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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회 예배가 끝나고, 뚜벅뚜벅 걸어 교보문고를 들렀다. 딱히 뭘 살 생각은 없었다. 그냥 오랜만에 들르자는 생각으로 갔다(실제로 내 지갑에는 책 살 돈도 없었고 말이다). 고등학생 시절, 학교가 그 근처라 일주일에 한 번 꼴로 갔다. 책을 좋아하는 게 가장 큰 동기이긴 했지만, 어느 순간부터는 서점 자체를 더 좋아하고 즐기게 되어 방문하는 경우가 늘었다.

 

 고등학생 때나 지금이나 사실 서점에 들르는 이유는 같다. 그리고 대개 방문목적이 뚜렷하지 않은 것도 여전하다. 흥미로운 책을 좀 읽으러, '책 냄새'를 맡으러 가기도 하고, 사람들을 관찰하기도 하고, 또 다른 사람들은 무슨 책을 읽고 있나 겉표지도 훑어보고, 베스트셀러 코너에서는 이건 뭐고 저건 뭐고. 응? 이게 왜 이렇게 잘 팔리는 거야? 아. 이게 이거한테 밀린다니.. 혼자 품평회를 하기도 하고. 여기저기 정처없이 돌아다니다가 신기한 서가에 가서 아무거나 뽑아 '우와, 이런 것도 있네.'하고 감탄하기도 하고. 

 그럼 서점에서 책을 사는가? 사실 거의 그렇지 않다. 사기로 마음 먹은 책이 있으면 인터넷에서 주문한다. 심지어 서점에서 좋은 녀석을 발견해도, 집에 가서 나중에 천천히 주문한다. 현장에서 사는 경우는 그 책이 급하게 필요할 때나, 당장 읽고 싶어서 답답할 때, 혹은 꼭 서점에서 사야겠다는 생각이 드는 것만 해당된다. 다시 말해 현장구매에 대해서는 관대하지 않다. 서점에는 '책과 놀러(Play with Book)' 가는 것이다.

 하지만 최근 들어 서점에 가는 목적이 하나 더 추가되었다: 독서에 대한 자극을 받기 위해. 아니, 자극 정도가 아니라 '도발' 당하기 위해. 오늘도 뼈져리게 느낀 거지만, 아. 맛있어 보이는 책이 얼마나 많던지! 그 중에는 슬쩍 훑어봤을 뿐인데 바로 사고 싶은 토실토실한 녀석도 있었고(나는 도서관에서 빌려보는 편이라 어지간해서는 사고 싶다는 생각을 안 하는데..), 관심은 가는데 도서관에 없어서 잠시 접어둔 녀석도 있었고, 속 내용을 직접 보고 싶은데 '재고없음'으로 뜬 녀석 등등. 온갖 도발을 그대로 보고만 있어야 했다.

 

 그래서 나는 지금 컴퓨터 앞에 앉아 조금 약오른 심정을 차분하게 하기 위해 자판을 두드리고 있다. 세상에 맛있는 책이 저렇게 많은데 다 읽어볼 수 없다니. 살아온 날보다 살아갈 나날이 더 많지만, 그래도 평생 열심히 책을 읽어도 저걸 다 접할 수 없다니. '비통함'보다는 '아까움'이다. 보물이 그득히 쌓여 있는데 자루가 작다거나 담을 시간이 모자라서 포기해야 하는 심정이라고 하면 적절한 비유일런지?

 그래서 동시에, 1초 1초 시간을 무척 소중히 여겨야겠다는 자극 또한 받는다. 펑펑 낭비하며 허송세월하는 시간에 다른 의미 있는 일을 한다거나, 책을 읽는다면, 좀 더 밀도 높은 삶이 되겠지?

 

 책 살 돈도 없으면서 나는 대형서점에 들른다. 책과 놀기 위해. 책에게 도발당하기 위해. 동시에 시간을 귀하게 써야겠다는 자극을 받기 위해.

Posted by 비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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