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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역

저자
김혜진 지음
출판사
웅진지식하우스 | 2014-05-19 출간
카테고리
소설
책소개
1억원 고료 제5회 중앙장편문학상 수상 당신이 버릴 수 없는 마...
가격비교 글쓴이 평점  

 최근에 자기계발 서적을 즐겨 읽었다. 새로운 사실을 알고, 좀 더 나은 나로 변화시키는 게 좋았다. 그런데 문득, 건조해지기 시작했다. 다 맞는 말인데. 좋은 이야긴데. 이런저런 이론 말고 '사람 사는 이야기'가 그리웠다. 왜 있잖은가. 한동안만이라도, 잠시라도 간직하고 곱씹을 수 있는 그런 이야기. 말랑말랑한 멜로도 괜찮고, 기괴한 이야기도 괜찮고, 어쨌든 사람과 사람이 만나 서사가 되는 그런 이야기.

 이야기에 허기를 느낀 건 자정이 가까운 시각이었다. 사놓고 읽지 않은 소설책들에는 손이 가지 않았다. 전자책 도서관에 접속했다. 그런데 서점 가서 소설분야를 둘러본지도 오래되어, 요즘 무슨 작가가, 작품이 좋은지 선별할 수 있는 능력도 사라졌다. 그래서 그냥 분야별로 보기를 눌렀다. 이 책, 저 책,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그러다가 이 책 <중앙역>에 눈길이 갔다.

 

 김혜진 장편소설 『중앙역』. 이 책은 갓 거리의 삶으로 편입된 한 젊은 남자의 관찰로 이야기를 시작하는 소설이다. 젊은 남자가 역 앞 광장에 들어선다. 거리의 생활에 갓 편입된 그에게 노숙은 불편하다. 그런 그에게 늙고 병든 여자가 다가온다. 그녀는 쥐가 무섭고 거리가 춥다면서 그의 품에 안겨 잠들지만, 밤새 그의 전재산이나 다름없는 캐리어를 훔쳐 달아난다. 그는 분노하여 가방을 찾느라 난리지만, 사실 그가 그리워하는 건 여자의 살결이다. 며칠 후 그는 여자를 발견하고, 가방을 내놓으라며 그녀를 다그치는데…….

 

 '아이고. 또 여자 하나에 미치는 한 남자의 이야기겠네.' 첫인상. 그런데 노숙이라는 소재가 정말 흥미롭게 느껴졌다. 이 흥미는 차차하더라도, 책을 더 고르기 귀찮은 데다가 첫 장편인 신예작가라는 데 흥미를 느껴 읽기 시작했다. 소설 배경이 되는 '중앙역'은, 내 생활권에서 가장 큰 어떤 역을 떠올리면서.

(다 읽고 난 감상을 뭐라고 표현해야 할까. 소설을 안 읽었더니 이제 알맞은 표현 찾기도 어려워진 모양이다.)

 

ㅡ말랑말랑하고 뜬구름 같은 로맨스도 없다. 고난 끝에 결국 성공한다, 사랑을 이룬다 이런 성공신화도 없다. '그리고 그들은 행복하게 잘 살았답니다' 식의 동화도 없다. 주인공이 남들과는 좀 다른 존재로 묘사되지도 않는다. 되려 평범해지다못해 비굴해져 삶의 굴레에 속하는 모습이 참 현실적으로 잘 나타나 있다.

 

 "나는 저 사람들과 다르다. 나는 이곳을 떠날 수 있다. 스스로에게 얼마간의 유예 기간을 주기도 한다. 하루가 지나면 또 하루만큼 늘어가는 유예 기간 따위가 아무 소용없다는 걸 알면서도 그렇게 한다."

-12%(전자책이라 쪽 수가 없다.)

 

"누가 돈을 주기만 한다면 나는 이곳에서 죽는 시늉도 할 수 있을 것 같다. 네 발로 기고 바닥에 떨어진 음식도 핥아 먹을 수 있을 것 같다. ... 사람들에게 혐오감을 주지 않도록 해야 한다. 나는 정말 그렇게 한다."

-85%

 

 무슨 연유에선지 노숙생활을 선택한 남자. 그리고 그에게 다가온 한 여자. '살결'을 섞고, 남자는 여자를 갈망하기 시작하고. 남자는 끊임없이 묻는다. 날 좋아하느냐, 날 사랑하느냐. 여자도 가끔 묻는다. 날 좋아하냐, 사랑하느냐. 둘은 자주 몸을 섞는다. 마치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듯. 남자는 사랑한다고 생각해서 그녀를 위해 희망을 가지고 열심히 일해보기도 한다. 하지만 결국, 사랑하느냐는 물음에 둘 다 확실히 답하지 못한다. 확신에 차서 답했다가도 이윽고 흐려진다. 뭐가 뭔지 스스로도 모르기 때문이다.

 

"난 그냥 살았어. 그게 다야. 이제와 그걸 너한테 사과할 필요는 없는 거잖아"

"너한테도 과거가 있잖아. 우리도 언젠가 과거가 돼. 그렇게 되어버려. 제발 이렇게 시간 낭비하지 말자."

-38%

 

"잘 들어. 나는 어떻게든 여기서 널 벗어나게 해 주려..."

"벗어나고 싶지 않아요. 그러고 싶지 않다고!"

-83%

 

 대화에서도 잘 드러나있지만, 과거는 있으나 있는 게 아니다. 자기 과거도, 여자의 과거도 모른다. 미래를 말하며 길바닥에서 벗어나게 도와주려는 사람의 호의도 필요없다. 다만 남루하게 늘어진, 그래서 '그냥 살아야' 하는 현재만이 있을 뿐이다. 구걸로, 일용직으로 하루 벌어서 그 돈으로 술 파티를 벌이고, 서로 몸을 섞고.

 

 나는 함부로 낙관하고 서둘러 비관하는 대신 똑바로 서서 지금과 맞서는 법을 배울 것이다. 과거나 미래 따위는 없다고 생각할 것이다. 지금 서 있는 자리에 뿌리를 박는 법을 터득할 것이다. 당장 눈앞에 보이는 것만을 보고 쥐고 만질 것이다. 오늘은 반드시 이곳을 말끔히 청소해야 한다. 나는 그것만 생각한다.

-91%

  위의 독백은 마지막에 나오는 장면으로, 결연한 의지가 느껴지기까지 한다. 과거나 미래 같이 뜬구름이 아니라, 명백한 현실인식을 통해 일어서리라는 비장한 의지도 느껴진다. 하지만 나는 왜 이 작품에서 내내 씁쓸함을 느꼈을까. 아직 가슴이 팔딱거리며 뛰는 새파란 20대라서? 아직은 현실보다 꿈 꿀 게 많은 젊음이라서?

 

 <중앙역>을 읽는 내내 우리 세대를 생각했다. 청소년, 청년세대를. 내가 누구인지, 뭘 하고 싶고 뭘 좋아하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다만 대학 가는 게 중요하고, 성적과 학점, 그러다가 또 취업, 승진, 돈 많이 벌기, 성공.. '다들 그렇게 살잖아. 어쩔 수 없어.' 자기 자신이 누군지도 모르고, 설령 알았다 해도 잊어버린 채 하루살이로 그냥 '사는대로 사는' 삶. 어떻게든 여기서 벗어나게 해주겠다는 그 말에 대해서도 '놔둬요! 그냥 죽어버리게!'나 다름 없는 외침으로 응수한다. 사랑인지 아닌지 헷갈리지만 어쨌든 몸이 반응하니까 서로 사랑한다고 믿는다. 그런데 사실은 공허해서, 불안해서, 항상 사랑하냐고 되묻고. 결정적인 순간에는 '몰라요! 나 이 사람 모른다고요!'라며 내버리는.

 사는대로 사는 삶.

 

  새삼 내가 하고 있는 활동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게 된다. 삶과 죽음의 문제를 다루고, 영원함에 대해 이야기하고, 그래서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주어진 사명을 알고 실현해나가도록 하는, 생명구원에 대해서. 많은 분들의 도움과 또 은혜가 없었으면 나 또한 이런 삶을 살고 있었으리라는 생각을. 동시에, 마치 영화나 동물을 관람하듯 먼발치에서 관조하지 말아야 한다는 생각 또한 한다. 함께 호흡하며 부대끼자.

 

 한 사람이라도 더 세우자. 한 사람이라도 더.

 

 

Posted by 비류
|

 


세계민담전집. 3: 몽골

저자
유헌수 지음
출판사
황금가지 | 2003-09-15 출간
카테고리
역사/문화
책소개
몽골 민담을 대표하는 주인공은 '엄청난 거짓말쟁이' 척척 셍게다...
가격비교

그 나라를 알려면 그 나라의 민담을 읽어보라고 하셨다. 그래서 찾다가 읽게 된 몽골편 민담전집. 과연 공부를 더 해야겠다는 생각과 과제를 잔뜩 남겨주었다. 가장 생소했던 건 불교 요소였다. 다양한 라마승의 직위, 역할 하며, 청나라 시대의 영향을 받았을 여러 가지 관직이라든가.. 그리고 우리나라의 옛 이야기처럼 오랜 전래설화를 생각하고 폈는데, 이야기 대부분이 1900년대 이후에 지어졌을 것으로 추측되는 점이 낯설었다.

 내가 몽골문화나 사회에 대해 아는 것이 많지 않다는 것을 다시 한 번 깨닫게 되었다. 다 읽고서도 무엇인가 찜찜한 기운만 잔뜩 남았다. 무지함에서 오는 찜찜함.

 그래도 한 가지는 정말 좋았는데 첫째로는 '엄청난 거짓말쟁이 척척 셍게'이다. 이름부터가 희한한데 하는 행동, 그리고 거짓말을 하는 기지 자체도 엄청 독특하다. 역자인 유원수 교수님은 민중이 척척 셍게를 사랑했을 것이라고 짐작하시는데, 과연 그럴만하다. 특히 재밌게 읽었던 여러 이야기의 공통점은 소위 '높으신 분'들을 거짓말로 곯려주는 것이다. 단순히 골탕먹이는 것을 넘어 민중의 애환이나 세상에 대한 풍자가 깊게 서려 있는 점이 인상 깊었다.

 책을 읽고 생긴 몇 가지 의문을 적어두었다가 교수님께 들고 갔더니 "이런 건 나 한 사람의 견해로 답할 수 있는 게 아니지. 네가 공부하고 판단해야 할 부분이야." 라는 답변을 들었다.

 

 그래. 맞는 말이다. 앞으로 더 공부해야겠다..;

Posted by 비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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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93

 "자기가 죽는다는 건 누구나 알지만, 거의 모든 사람들이 마음속에서 그 생각을 밀어내고 산다는 거죠. 항상 그 생각이 머릿속에 있지만, 누가 물었을 때가 되서야 안다고 대답하죠. 하지만 그러다가 갑자기 그걸 알게 되는 순간이 있어요, 안 그래요? 문득 내가 언젠가 죽는다는 생각이 떠오르면 '세상에, 이게 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사실인데 잊고 있었구나'라는 말이 나오죠."

 

p.105

 자살은 한순간일 뿐이라고 렉시는 내게 말했다. 그녀는 내게 자살을 꼭 그렇게 표현했다. 한순간의 일이라고.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다거나, 태양이 빛나고 있으며, 보고 싶어 안달하던 영화가 이번 주에 개봉한다는 사실 따위는 안중에 없게 되는. 잘 되는 일이 아무것도 없ㄱ으리란 생각이 퍼뜩 떠오른다. 영영 그럴 것 같다. 그래서 자신에게 묻는다. 이게 다란 말이야?

 

 p.106

(자살을 결심했다가 포기한 뒤)그러면 평범한 생활로 돌아간다. 하지만 그것은 마음에 계속 남는다. 그 생각을 일부러 하지 않더라도, 그날의 선택권이 내게 있다는 걸 알고 위로를 받는다. 사탕을 뺨 안쪽에 밀어넣듯이, 그 생각을 마음 구석에 밀어놓는다. 그 뒤에 묻어둔 기억은 혀를 굴릴 때의 달콤한 쾌감과 똑같다.

==============================

 동사무소 도서관 서가를 거닐다가, "당신도 개에게 말을 건네본 적이 있나요?"라는 문구에 이끌려 선택한 책. 나도 짱이한테 이런저런 이야기를 많이 했었지. 속상하면 끌어안고 울기도 하고ㅎㅎ 보고 싶구나. 그 예쁜 얼굴, 아름다웠던 털도 이제 슬슬 썩어가고 있을까. 죽은지 벌써 아홉 달이 지났네.

 

 책을 덮고 느낀 건, 음. 이 책을 이해하기엔 내가 경험이 너무 없다. 그런 것도 느꼈고, 예상했지만 '재미'가 주된 건 아니라는 점(바로 전에 읽은 책이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인 영향이 있다.). <하치 이야기>처럼 개가 중심이 되어 풀려나갈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라서 실망 아닌 실망을 한 점도 좀 있고.

 하지만 폴과 렉시가 함께 했던 추억들을 되짚어나가는 전체적인 구성, 그리고 한 이야기 한 이야기 속에서 씨실과 날실이 교차하며 만들어지는 깊은 의미 등은 짜임새 있다.

 렉시가 이따금 분노를 참지 못하고 폭발했다가 후회하는 연약한 모습 등은 나도 모르게 조금 안도하며 읽었다. 내 모습과 겹치기도 했고, 마치 아무런 결함이 없는 것 같은 여러 소설 속 여주인공들과는 대비되었던 까닭이다. 비교의식이 불러온 안도감 같다.

 

 나중에, 언젠가 내가 아주 사랑했던 누군가를 떠나보내게 된다거나 결혼해서 아내가 생기거나 한다면. 풍파가 몰아치고 삶의 질곡 때문에 사랑하는 사람이 간절해지면. 그때 다시 생각날 소설일 거라 생각한다. 솔직히 지금은 별 감흥을 느끼지 못한다.

Posted by 비류
|


저녁놀 천사

저자
아사다 지로 지음
출판사
노블마인 | 2010-10-06 출간
카테고리
소설
책소개
지금 당신에게는 추억하고 싶은 사람이 있습니까?일본문단을 대표하...
가격비교

 비문학 책을 읽다가 지쳐 도서관(사실 '문고'라고 하는 게 더 맞을지도..)으로 향했다. 산뜻하고 읽기 쉽게 잘 쓴 저작이었지만, 예전부터 문학을 훨씬 선호했던 탓에, 목말랐다.

 

 서가를 둘러보며 무엇을 고를까 고민하는데 아사다 지로의 작품들이 늘어선 게 보였다. <프리즌 호텔>, <지하철>등등.. 그 중 <저녁놀 천사>를 골랐다. 서가에 있는 지로 작품은, 굳이 구분하자면 둘 중 하나였다. 유쾌하거나 감성을 자극하는 아릿한 것이거나. <철도원>, <지하철>, <칼에 지다>를 읽었고 그때문에 지로를 좋아하게 된 나로서는, 유쾌한 작품은 선뜻 집어들기 망설여졌다.

 단편소설집이라 호흡도 적당했고, 가슴을 적시는 좋은 이야기들도 많아 이번에도 만족스러웠다. 표제가 된 <저녁놀 천사>의 마지막 두 문단은 뭉클한 감동을 선사해주었다. 그렇게 깊게 들어가지 않아서 '내용 전게는 이게 끝?'하고 생각했는데 마음을 요동치게 하기엔 충분했다. <차표>는 '유년시절 헤어진 좋은 사람에 대한 추억'이란 소재 자체가 좋았다. 나도 그런 사람들이 있어서 공감 되었다. <특별한 하루>는 제목과 반대되게 무덤덤하고 담담한 주인공과, 반전, 그리고 끝까지 조곤조곤한 마무리가 좋았다. 나라면 어땠을까? <호박>은 이해가 부족하여 다시 읽어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언덕 위의 하얀집>은 온다 리쿠의 소설과 착각할 정도로 달콤한 동시에 오싹했다. <나무바다의 사람>은 윤동주님 작품 <자화상>을 떠오르게 했다. 시공간의 왜곡이든 환영이든, 내가 나를 만났다면? 어떤 느낌이고 그 뒤 무슨 생각을 했을까?

 

 고등학교 때 국어학원 선생님이 '어느 작가의 역량을 보려면 그 사람의 단편소설을 보라'고 말씀해주신 적이 있다. 말마따나 단편소설 여러 편을 보면 그 작가의 문체나 무게 등이 모자이크처럼 드러나곤 했다. 좋아하는 작가 중 이례적으로 단편집을 많이 읽은 지로지만, 동시에 읽을 때마다 실망시키지 않는다. 걸출한 작가다.

 그런 의미에서 다음은 지로의 장편을 선택해보기로 할까..? 글 작성을 마치고 다시 문고에 갈 생각인데, 좀 고민해봐야겠다. 

 

Posted by 비류
|

#1
 그리고 작전에 나가서 비로소 인생에는 유치한 일이 없다는 것을 알았다. 서울역에서 두 연인들이 헤어지는 장면을 내가 깊은 연민을 가지고 소중히 간직하던 것과 마찬가지로, 미자는 우리들 모두를 제 것으로 간직한 것이다. 몰개월 여자들이 달마다 연출하던 이별의 연극은, 살아가는 게 얼마나 소중한가를 아는 자들의 자기표현임을 내가 눈치 챈 것은 훨씬 뒤의 일이다. 그것은 나뿐만 아니라, 몰개월을 거쳐 먼 나라의 전장에서 죽어간 모든 병사들이 알고 있었던 것이다.

-황석영, <몰개월의 새>中

#2
 "서울 두 장이요."
 "오늘은 200원 없나봐요?"
 "예. 깜빡 잊고 두고 나왔네요. 하하. 감사합니다."

 학교에 도착하는 아침이면 도서관 매점 아주머니와 늘 주고받는 대화다. 대개는 200원을 챙겨와서 "서울 두 장이요/감사합니다."로 끝나지만.
 통학버스로 오가는 데 하루에 8200원이 든다. 그래서 두 장씩 사려고 만 원을 내곤 하는데, 잔돈이 없으면 1800원을 받았다. 주머니 속에서 꽤 많은 양의 동전이 짤그락거리는 게 그리 싫진 않지만, 거슬러 받기도 번거롭고 지폐가 한 장만 돌아오는 걸 보면 뭔가 마음에 차지 않았다. 참 이상한 강박이다. 그 때문에 200원을 준비해가곤 했다. 총 10200원. 그럼 서로 계산도 쉽고, 지폐가 두 장이 돌아와서 동전보다 더 부자가 된 기분이라 좋았다.
 이런 일을 반복하다보니 어느 때부터 아주머니께서 나를 인식하기 시작했다. 눈썰미, 붙임성이 좋으셔서 여러 사람을 알고 계셨다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내게는 고유한 특징이 있었다. 늘 200원을 준비해오는 남학생. 착실하게 준비해오다보니, 어느 날은 잔돈이 필요했는데 먼저 2000원과 승차권 두 장을 꺼내놓으셔서 멋쩍게 웃은 일도 있다.

#2-1
 "서울 두 장이요. 아주머니 저 휴학해요."
 "응? 휴학? 왜."
 "뭐, 군대도 가야 하고.."
 "아 그래? 그럼 다음 학기 와서 사지 왜 미리 사둬."
 "기념으로 간직하고 있으려고요."
 "혹시 환불 받고 싶으면....(중략)"

#3
 1년. 아니. 1학기하고 2학기니까, 도합 6개월. 그동안 '200원'이라는 의도하지 않은, 소박한 방법으로 누군가에게 각인되었다. 그 과정 중에 매일 짤막한 이야기를 주고받고, 때론 일부러 잔돈을 만들기 위해 800원을 받기도 했다. 책상 위에 놓인, 움푹 파여있는 질그릇 안에 미처 처리하지 못한 잔돈들이 남아있다.
 이렇게 보면 무슨, 서로를 무척 특별하게 생각하는 사이 같다. 그러나 실상은 별 거 없다. 아주머니는 내가 뭘 전공하고 있는지, 서울 어디 살고 있는지, 모른다. 나는 아주머니가 언제부터 여기서 매점을 운영하게 되셨는지, 간식으로 무슨 음식을 추천하시는지, 모른다. 결정적으로 아주머니도 나도 서로의 이름을 모른다. 언제 쓸지 모르는 여분의 승차권을 사고 나오면서 여쭤볼까 했지만, 그럴 필요는 없었다. 그저 남남일 뿐이었다. 의미부여하며 갖다 붙인다 한들. 그래서 무미건조하게 발걸음을 옮겼다.

#Overall
 '몰개월의 새'에서 여주인공 '미자'는 파병 나가는 주인공 '나'를 배웅한다. 그런 모습을 보면서 '나'는 이전에도 이러한 광경이 있었으리라 짐작한다. 하지만 결코 나쁘게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의 고백처럼 "살아가는 게 얼마나 소중한가를 아는 자들의 자기표현"으로 받아들인다.
 혹시 아는가. 몇 년 전에도 나처럼 꼬박꼬박 잔돈을 준비해오는 학생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학교를 졸업하여 떠나고, 신입생인 내가 들어오고, 반복되고, 반복되고.. 그런 과정 속에서 어렴풋이나마 나는 기억될 것이다. 어차피 몇 년 뒤면 내가 떠나고 다른 사람이 들어오리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아주머니는 나에 대해 아무것도 묻지 않았던 걸지도 모른다. 그리고 나도, 이 간극을 메울 필요는 못 느꼈고.
 다만 '지나간 사람들'은 아주머니를 기억하리라. 그렇기 때문에 학생들에게 더 친밀하게 대하시는 걸지도 모르겠다.
Posted by 비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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