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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그리고 작전에 나가서 비로소 인생에는 유치한 일이 없다는 것을 알았다. 서울역에서 두 연인들이 헤어지는 장면을 내가 깊은 연민을 가지고 소중히 간직하던 것과 마찬가지로, 미자는 우리들 모두를 제 것으로 간직한 것이다. 몰개월 여자들이 달마다 연출하던 이별의 연극은, 살아가는 게 얼마나 소중한가를 아는 자들의 자기표현임을 내가 눈치 챈 것은 훨씬 뒤의 일이다. 그것은 나뿐만 아니라, 몰개월을 거쳐 먼 나라의 전장에서 죽어간 모든 병사들이 알고 있었던 것이다.

-황석영, <몰개월의 새>中

#2
 "서울 두 장이요."
 "오늘은 200원 없나봐요?"
 "예. 깜빡 잊고 두고 나왔네요. 하하. 감사합니다."

 학교에 도착하는 아침이면 도서관 매점 아주머니와 늘 주고받는 대화다. 대개는 200원을 챙겨와서 "서울 두 장이요/감사합니다."로 끝나지만.
 통학버스로 오가는 데 하루에 8200원이 든다. 그래서 두 장씩 사려고 만 원을 내곤 하는데, 잔돈이 없으면 1800원을 받았다. 주머니 속에서 꽤 많은 양의 동전이 짤그락거리는 게 그리 싫진 않지만, 거슬러 받기도 번거롭고 지폐가 한 장만 돌아오는 걸 보면 뭔가 마음에 차지 않았다. 참 이상한 강박이다. 그 때문에 200원을 준비해가곤 했다. 총 10200원. 그럼 서로 계산도 쉽고, 지폐가 두 장이 돌아와서 동전보다 더 부자가 된 기분이라 좋았다.
 이런 일을 반복하다보니 어느 때부터 아주머니께서 나를 인식하기 시작했다. 눈썰미, 붙임성이 좋으셔서 여러 사람을 알고 계셨다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내게는 고유한 특징이 있었다. 늘 200원을 준비해오는 남학생. 착실하게 준비해오다보니, 어느 날은 잔돈이 필요했는데 먼저 2000원과 승차권 두 장을 꺼내놓으셔서 멋쩍게 웃은 일도 있다.

#2-1
 "서울 두 장이요. 아주머니 저 휴학해요."
 "응? 휴학? 왜."
 "뭐, 군대도 가야 하고.."
 "아 그래? 그럼 다음 학기 와서 사지 왜 미리 사둬."
 "기념으로 간직하고 있으려고요."
 "혹시 환불 받고 싶으면....(중략)"

#3
 1년. 아니. 1학기하고 2학기니까, 도합 6개월. 그동안 '200원'이라는 의도하지 않은, 소박한 방법으로 누군가에게 각인되었다. 그 과정 중에 매일 짤막한 이야기를 주고받고, 때론 일부러 잔돈을 만들기 위해 800원을 받기도 했다. 책상 위에 놓인, 움푹 파여있는 질그릇 안에 미처 처리하지 못한 잔돈들이 남아있다.
 이렇게 보면 무슨, 서로를 무척 특별하게 생각하는 사이 같다. 그러나 실상은 별 거 없다. 아주머니는 내가 뭘 전공하고 있는지, 서울 어디 살고 있는지, 모른다. 나는 아주머니가 언제부터 여기서 매점을 운영하게 되셨는지, 간식으로 무슨 음식을 추천하시는지, 모른다. 결정적으로 아주머니도 나도 서로의 이름을 모른다. 언제 쓸지 모르는 여분의 승차권을 사고 나오면서 여쭤볼까 했지만, 그럴 필요는 없었다. 그저 남남일 뿐이었다. 의미부여하며 갖다 붙인다 한들. 그래서 무미건조하게 발걸음을 옮겼다.

#Overall
 '몰개월의 새'에서 여주인공 '미자'는 파병 나가는 주인공 '나'를 배웅한다. 그런 모습을 보면서 '나'는 이전에도 이러한 광경이 있었으리라 짐작한다. 하지만 결코 나쁘게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의 고백처럼 "살아가는 게 얼마나 소중한가를 아는 자들의 자기표현"으로 받아들인다.
 혹시 아는가. 몇 년 전에도 나처럼 꼬박꼬박 잔돈을 준비해오는 학생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학교를 졸업하여 떠나고, 신입생인 내가 들어오고, 반복되고, 반복되고.. 그런 과정 속에서 어렴풋이나마 나는 기억될 것이다. 어차피 몇 년 뒤면 내가 떠나고 다른 사람이 들어오리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아주머니는 나에 대해 아무것도 묻지 않았던 걸지도 모른다. 그리고 나도, 이 간극을 메울 필요는 못 느꼈고.
 다만 '지나간 사람들'은 아주머니를 기억하리라. 그렇기 때문에 학생들에게 더 친밀하게 대하시는 걸지도 모르겠다.
Posted by 비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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