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력

42024  이전 다음

  • 1
  • 2
  • 3
  • 4
  • 5
  • 6
  • 7
  • 8
  • 9
  • 10
  • 11
  • 12
  • 13
  • 14
  • 15
  • 16
  • 17
  • 18
  • 19
  • 20
  • 21
  • 22
  • 23
  • 24
  • 25
  • 26
  • 27
  • 28
  • 29
  • 30

보호되어 있는 글입니다.
내용을 보시려면 비밀번호를 입력하세요.

퇴근하고서 할머니 댁을 찾아갔다. 집에서 출발하는 것보다 근무지에서 출발하는 게 더 가깝기도 하고, 복지관에서 돌아오신 뒤라 댁에 계신 까닭이었다. 두 달 전에 찾아갔었지만, 그새 길을 잊어버려 위성지도와 로드뷰로 검색했다.

 

 할머니가 사시는 곳은 몇 십년 전만 해도 힘차게 발전했지만, 지금은 쇠락한 동네다. 그때문인지 어렸을 적 풍경과 거의 일치했다. 달라진 게 있다면 길 양 옆으로 있던 사무실 건물들이 조금 바뀌었다거나, 리모델링을 해서 새로워진 집이 있다는 것 정도. 그리고 꼬마였던 내가 커져서, 길 폭이 좁아지고 벽이 낮아진 것처럼 느꼈다는 것.

 길을 걸으며 지난번과 같은 생각을 했다. 변한 게 없다, 생각보다 가깝다, 그런데 난 왜 이제서야 여길 찾아왔을까? 할아버지도 살아계실 때 왔으면 더 좋았을 걸. 아직 할머니라도 계셔서 다행이다. 더 자주 찾아봬야지.

 

 할머니는 저녁식사도 마다하시고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는 데 집중하셨다. 이런저런 사는 이야기, 생각들, 어렸을 적 에피소드 등. 같이 이야기하는 것만으로도 할머니께는 큰 힘이 되는 것 같았다. 이젠 연세가 있으셔서 머리도 새하얗고, 거동도 불편하시지만, 이야기할 때만큼은 예전과 다를 게 없으셨다.

 한 시간 반 정도, 내내 이야기를 나누다가 작별하고 집으로 돌아갔다. 가는 길에 많은 생각이 떠올랐다가, 가라앉았다가, 다시 튀어올랐다가, 잠잠해졌다. 이게 뭘까? 스스로에게 설명하려고 해도 뭐라 말해야 할지 모르겠는 이 느낌은. 앞으로 자주 찾아뵈면서 이 묘한 느낌을 좀 더 구체적으로 끌어내리라.

 

 가끔 할머니께 찾아가는 게, 본인은 물론 나에게도 정서적인 안정을 가져다주는 것 같다. 알게 모르게 큰 영향력을 미친다. 내 마음에.

Posted by 비류
|

나는 자아성찰을 꽤 좋아하는 편이다(이런저런 사연이 있다.).

 성찰하기 가장 좋은 시간은 오후 10시~새벽 2시다. 그 이전엔, 아직도 분주함이 여기저기 묻어있거나 하루 마무리 수순을 밟고 있지 않는다. 대개. 그리고 2시 이후에는, 집중력도 떨어지거니와 다음날 생활에도 지장이 있기 때문에 바람직하지 않다. 가장 좋은 성찰환경은 고요한 내 방, 책상 앞이다.

 오늘, 오랜만에 성찰이 참 잘 되고 있어서 기쁘다(바로 지금 이 순간!). 하나하나 돌아보고 싶었던 부분들을 글로, 자유로운 형태와 방식으로 풀고 나니 참 개운하다. 그리고 자기 전 이 글을 적으면서, '성찰 환경'에 대해 인식하고 돌아보게 되었다.

 

 인식할 수 있는 최초의 성찰이 이루어진 건 초등학교 고학년 때. 그 환경에서, 이사가기 전인 중3 말까지 지냈다. 우리 동이 단지 끝에 있어 창문 너머가 후문 뚝방길이었고, 정말 조용했다. 차도 사람도 거의 안 지나다니고 키 큰 가로수들과 예쁜 꽃, 풀만 가득했다(지금 돌이켜보면 집 근처에 그런 좋은 장소가 있었다는 게 큰 행운이다. 꼭 방 안에서만 성찰한 게 아니라, 그 뚝방길에 반은 자연적으로, 반은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산책로를 걸으면서도 사색을 많이 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세 번 이사를 했는데, 그때가 가장 조용한 환경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언덕 도로를 올라가면 차들이 쌩쌩 달리기 때문에 소리가 안 나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요했다. 가장 우울하고 힘든 시기를 가장 좋은 사색환경에서 보냈다는 게, 참 기묘한 일치다.

 

 그 다음으론 고등학생 시절과 대학교 1학년, 그리고 스물 하나의 절반을 보낸 고층집이 있다. 집에서 지하철역은 엎어지면 닿을 거리에 있었다. 다시 말해 대로 바로 옆이라서, 소음에 쉽게 노출될 수 있는 환경이었다. 그러나 감사하게도 차 소리가 그렇게 크진 않았고, 무엇보다 내 방은 대로와 가장 멀리 떨어진, 단지 안을 넓게 조망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

 햇살이 잘 들어서 낮시간을 좋아했지만, 저녁시간도 그에 못지 않게 좋아했다. 책상 앞에 앉아 이것저것 숙제나 공부를 하다가 고개를 오른쪽으로 틀면, 불을 밝힌 각 세대의 모습이 한눈에 들어오기 때문이었다. '다들 저 속에서 뭘 하고 있을까?'라는 생각은 기본이었다. 저녁시간대 모습을 기억해두었다가 새벽시간에 다시 밖을 보면, 극명하게 차이가 드러난다. 불이 켜진 세대가 거의 없다. 그때마다 '바쁘게 사는 것'이나 '밤이 주는 휴식'과 같은, 대비적인 주제로 글을 쓰곤 했다. 모의고사나 시험을 앞둔 새벽이면 더 밤에 젖어들었던 것 같다. 이 시기 이후로 밤을 더 소중하게 생각하게 되지 않았나 싶다.

 

마지막으로 작년 하반기에 이사 온 지금의 환경이 있다.

 여기도 고층이라면 나름대로 고층이지만, 좀 애매한 높이다. 책상에서 이것저것 하다가 고개를 들면 바로 밖을 볼 수 있지만(창이 정면에 있다.), 배란다가 가로막고 있어 고등학생 때 성찰환경에 비하면 형편없다. 굳이 배란다로 나가 밖을 보면, 방이 도로 쪽이라 차들과 낮은 건물들만 보인다. 그다지 볼 게 없다. 그렇기에 한 가지 장점은 확실한 듯하다. 책상에서 하는 일에 집중할 수 있다는 것. 한 가지 생각을 쭉 이끌고 가다가, 주변 환경을 보고 다른 생각이 유입되어 흐지부지 되는 일은 없다는 것.

 물론 지금 환경이 단점만 있는 건 아니다. 생각건대 이곳은 낮에 강점이 있다. 우선 해가 적당하게 잘 든다. 기분 좋을만큼 든다. 그래서 낮시간이 상쾌하다. 또한 낮에는 멀리 산이 보인다. 아득히 먼 것도 아니다. 딱 알맞게 잘 보인다. 기분전환하고 싶을 때마다 산등성이를 천천히 훑고 있으면, 방 위치가 매우 만족스럽다.

 

 성찰환경에 대한 성찰은 처음인데, 해보니 이런저런 추억도 떠오르고 참 좋다. 현재 장소에 대해 좀 더 애정을 가지고 인식하게 된 부분도 있고. 이후에도 이 글을 여러 번 수정하면서 더 '어루만지기'해야겠다.

 언제 또 어디로 이사를 가게 될지, 어떠한 사색 장소를 발견하게 될진 모른다. 다만 한 가지 확고한 바람이 있다. 자아성찰환경이 나에게 잘 맞아서, 성숙해가는 데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것이다.

 

 길었다. 그만 자자.

 

Posted by 비류
|

"아우, 연예인아!"

 

 요즘 친구들이 나를 지칭하는 말이다. 이 호칭을 들은지 몇 달 되었다. 처음엔 '뭐가 연예인이라는 거야?' 싶었지만, 요즘엔 수긍하고 있다. 그다지 바쁘지 않을 것 같은데 여기저기 참 바쁘게 돌아다닌다. 아침에 나가서 집에 들어오면 통상 10시, 11시. 방을 치우고 싶어도 집에 오면 피곤해서 바로 씻고 잠들게 된다. 다음날 새벽이면 새벽기도 가느라 일찍 집을 나선다.

 이렇게 바븐지도 모르다가, 며칠 전에 친구들이 하루 일정을 이야기 해달라고 했을 때 비로소 바쁘다는 걸 인지하게 되었다. 방에서 푹 쉬고 있는 지금, 이러한 새로운 인식이 조금 당황스럽다. 내가 이렇게 바쁠줄이야. 2주 뒤에 군사훈련 받으러 논산 가는 것도 실감이 나질 않는다. 그냥 이렇게 바쁜 와중에 시간 가다가, 훈련소에 뚝 떨어질 것 같다. 그때 정신상태는 괜찮으려나 모르겠네. 너무 극과 극인 환경이니.

 

 서원한 것은 그럭저럭 잘 지키고 있다. 지난 7년 간의 관습과 관성 때문에 힘들지만, 그래도 이 정도면 정말 잘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1월달에 집중해서 변화시키기로 한 습관은 '절반의 성공'이다. 2월달은 훈련소에 있으니 아무래도 그 부분에 대해서 고민해볼 필요가 있겠다.

 남은 1월도 알차게 보내서, 행복한 마무리가 될 수 있길 바라본다.

Posted by 비류
|

 무엇인가 이야기를 꺼내고 싶어서 '글쓰기'를 펼쳐놓고 있다. 그러나 정작 무엇을 쓸 것인지는 구체적으로 떠오르질 않는다. 한 편의 글을 엮어내고 싶은 마음만 있을 뿐이다. 오랜 시간, 하얀 화면에서 껌뻑이는 커서를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지만 여전히 달라지는 건 없다. 아깝다. 이 상태에서 글감이 확실했다면 또 하나의 글을 남기는 건데 말이다.

 오랜만에 마주하게 된, 글쓰기 애매한 순간을 달래보려 이렇게 글을 남겨본다.

Posted by 비류
|

 '편지'를 적극적으로 쓰기 시작한 건 고등학교 2학년 때가 처음이다. 엄청 좋아하는 친구에게 '서프라이즈!'를 선사해줄 생각으로 시작했다. 거기에 맛들려서 약 2년을 열심히 썼다. 시간이 흐르며 대상도 그 친구 한 명에서, '친하고 아끼고 소중하게 생각하는 사람들 대부분'으로 확대되었다.

 

 그리고 작년 하반기부터 편지쓰기가 시들해졌다. 이런저런 사연들이 있지만 그걸 곱씹자니 마음만 아플 것 같고, 파고파고 들어가면 부정적인 요소만 잔뜩 드러날 것 같다. 하여튼 수그러들었는데, 그 중 하나가 편지쓰는 것에 대해 무서움을 느꼈던 까닭이다. 무슨 무서움이냐면?

 컴퓨터 하드디스크나, 책장이나, 클리어파일을 뒤지다보면 가끔 쓰다만 편지나 써놓고 보내지 않은 편지들이 등장한다. 종이 위에 고정된 시간이 활자화되어 녹아있다. 대부분은 '그땐 이랬네.'나 '여전하네, 이런 부분은.' 같이 좋은 추억과 감정을 고양시키는 내용이지만, 어떤 편지는 마음이 아프기도 하다. 수신자가 당시엔 사이가 좋았다가 지금은 확 틀어진 친구라거나, 꼭 말하고 싶었던 내용이지만 시기를 놓쳐 말하기도 애매한 것이라거나.. 하는 것들.

 이것들을 보며 나는 내가 보냈던 수많은 편지와 내용들에 대해 되새기게 되었다. 그리고 내가 이를 다 기억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 현재는 그때와 정반대의 생각, 감정을 가지고 있을수도 있다는 사실, 무엇보다 상대가 그 글을 보관하고 있으며 원하면 다시 꺼내어 볼 수 있다는 사실 때문에 무서움을 느꼈다. 말에는 분명히 책임이 따른다. 그런데 그 책임을 질 수 없는 경우가 편지글에선 꽤 치명적으로 발생할 수 있는 것이다.

 편지를 열심히 쓰던 시절, 나는 시간이 막대하게 걸려도 '상대에게 이만큼 시간을 할애한다는 건 좋은 일'로 생각하고 기쁘게 헌신했다. 그러나 이제는 좀 머뭇거리게 되고, 내용도 훨씬 보편적이게 되고, 짧아졌다. 위에서 말한 '변화의 가능성'과 '책임' 때문이다. 내용이 상당히 간결해졌다는 점에선 고무적이지만, 왜일까. 과도기라 그런지 요즘은 '편지쓰기' 행위 자체가 많이 혼란스럽다.

 

 이제 나는 편지에 '뿌리'를 담아내는 연습을 해야겠다. 그래야 세월 속에서 어떤 변주가 이루어지더라도 나의 편지가, 내용 대부분이 유효할 테니까.

Posted by 비류
|

 컴퓨터가 하도 삐걱거려서(하드웨어 문제+소프트웨어의 버벅거림), 중요 자료를 백업 드라이브에 모아놓고 포맷을 했다. 삼촌이 오셔서 Mt.Lion과 Win7을 선택해서 구동할 수 있는 기묘한 환경을 만들어놓고 가셨다. 덕분에(?)3개의 하드디스크 중 하나를 포기하게 됐지만.

 개운한 마음으로 포맷, 재설치를 하고 재부팅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으니_백업 드라이브가 없어졌다. 하도 황당해서 재부팅을 4번 씩이나 해봤는데, 여전히 자료가 없었다. 잘못 포맷한 건가? 재설치한 뒤라 시스템 복구를 쓸 수도 없고.. 길게는 6년 된 자료도 있어 허탈감을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다행히도 삼촌이 "디스크 하나를 바꿔갔다."고 증언해주셔서, 거기 있겠거니 하고 안심하고 있다. 백업 드라이브가 없으니 컴퓨터가 참 허전하다. 왜냐하면 거기엔 내가 평소에 듣는 음악부터 오래 전 쓴 토막글까지, 아주 사소한 것 하나하나 다 저장되어 있는 까닭이다. 습관적으로 즐기는 게임이나 즐겨찾기까지.

 

 '블로그가 있어 참 다행이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잘못 포맷한 줄 알고 허탈해 할 때, 가장 먼저 떠오른 게 '그간 내가 썼던 모든 글이 날아가다니!'였다. 한때 작가를 꿈꾸며 열심히 적었던 쑥스러운 졸작들과, 토막글들, 미완의 글들... 그게 그냥 날아갔다는 생각에 아무 의욕도 없었다. 그러나 다음 순간, 블로그에 썼던 글은 오롯이 남아있으리란 생각에 조금이나마 위로가 되었다.

 문학소년의 패기가 꺾인지는 몇 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글쓰기는 내 삶의 활력소이다. 즐거움이다. 행복한 고민이다. 그렇기에 아무리 사소하고 하찮은 글이라도, 한 편 한 편이 소중하다. 하드디스크 데이터 손실사고로부터 안전할 수 있는 요런 공간, 블로그가 있어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앞으로는 블로그에 글쓰는 비중을 더 늘려야겠다. 공개글은 여전히 꺼려지지만 말이다.

Posted by 비류
|

 방금, 얼마 전에 새로 산 책을 다 읽었다. 좋아하는 작가의, 관록이 묻어나는 책이라 그런지, 두께에 비해 단숨에 읽은 느낌이다. 출판정보 쪽까지 다 읽고 탁 덮은 뒤, 책장에 비집어 넣었다. 그러면서 서가를 눈으로 훑어봤다. 요새 청소년이고 성인이고 책을 안 읽는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독서 애호가는 수없이 많다. 양질의 독서를 하는 고수들도 주변에 널려 있다. 그런 사람들에 비하면 나는 아직 걸음마 수준이라 할 수 있겠다. 들은 것은 많은데, 심도 있게 훑으면 말문이 막혀버린다. 그렇다고 해서 건성으로 읽는 것도 아닌데. 다만 직접 읽어보지 못한 고전이나 유명한 책이 많을 뿐이다(말은 항상 청산유수. 그나저나, 도서관이나 얼른 찾아봐야 할 텐데.)

 책장에 얌전히 혹은 어지럽게 배열된 책무리를 다시 훑었다. 대부분은 읽었지만, 사놓고 읽지도 않은 책도 조금 보이고(!), 읽다가 이런저런 핑계 대면서 다 못마친 책, 중도에 던져버린 책, 두번세번 읽고도 아직도 난해한 책, 지금 다시 읽어도 정말 재밌는/좋은 책 등등 그 종류도 무척이나 다양하다. 책장을 조심스레 닫자 그네들은 유리장 너머에서 자기 위치를 지켰다. 영화를 보려고 컴퓨터를 켰는데, 문득 무슨 말인가 쓰고 싶어 또 '등산일지'를 적는다.

 

 나는 책은 그럭저럭 읽는다. 많이 읽지도, 그렇다고 적게 읽지도 않는다는 뜻이다. 그런데 내용을 잘 기억하지 못하는 편이다. 관심이 없는 것도 아니다. 읽을 땐 집중해서 열심히 읽는데, 시간이 지나고 누군가 내용을 물어보면 대개 '잘 모른다'라고 답할 수 밖에 없다. 심지어 방금 읽고 덮은 책도(좀 추상적인 내용이긴 했으나)요약해서 말해달라 하면 조금 막힌다. 독서코칭이라도 받아야 하나?

 세 번을 읽었는데도 머릿속에 아무것도 남지 않아있는 사회과학 서적, 한 번 읽고서 긴 이야기를 할 수 있게 된 작품, 볼때마다 새로운 작품.. 천차만별이다. 특히 거듭해서 읽어도 아무 기억에 남지 않는다는 건 참 충격이 아닐 수 없다. 

 난 책을 읽을 당시엔 주로 주인공의 감정에 집중하고 이입해서 본다. 그리고 남는 것 또한 감정의 흐름이다. 내용을 뚜렷이 기억하는 책을 되짚어보면, '감정'이 스토리라인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 작품들이다. 이걸 강점으로 활용할 수는 없을지?

 

 우와. 이 글은..글이 아니다. 그냥 독백이다. 내가 무슨 이야길 하고 싶은 건지 모르겠다. 그래, 혼란스러운 정신상태를 충실하게 반영하고 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나. 두서없는 독백은 이 정도로 접어두고, 일단 근처의 도서관부터 찾아보자. 아직 읽고 싶은 책이 많다.

Posted by 비류
|

(이 글은 Fiction임을 알려드립니다.)

참조사진: http://thehobbit.tistory.com/199


 "식약청 조사 결과 대부분의 제약회사들이 TV나 신문 등에 과대.과장광고를 하고 있는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주로 성분을 늘리거나 줄이는 수법을 써서 소비자들을 속여왔습니다."

 TV에서 또 달갑지 않은 뉴스가 흘러나왔다. 어제 회식자리의 후유증을 해소하기 위해, 광고를 보고 소화제를 하나 사먹었기 때문이다. 차라리 몰랐으면 속 편했을걸. 괜히 틀어놨다. 그래도 끄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끄면 공허하다. 자취생활 시작하면서부터 혼자인 시간이 압도적으로 많아졌다. 그때문에 자주 외로워지고, 사람이 그립다. 처음 한 주는 내 시간, 내 공간이 주어졌다는 사실에 기뻐했으나, 이젠 처절하게 혼자라는 사실이 심술궂게 속을 뒤집어놓는다.

 

 "'왕따'가 직장 내에서도 심각한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전문설문조사업체와 본 방송국이 직장에 다니는 성인남녀 0000명을 대상으로 설문을 실시한 결과...."

 

 뉴스. NEWS. North East West South. 사방의 소식을 전하는 매체. 혼자 사는 세상이 아니기 때문에, 그리고 나는 지금 혼자이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의 삶은 어떤지, 그리고 함께 살아가야 하는 이 세계는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알 필요가 있다. 하지만 나는 뉴스를 좋아하지 않는다. 통신매체의 발달로 사방의 소식은 물론 지구 반대편 소식까지 생생하게 전해주는 뉴스 본연의 목적에는 참 충실해졌으나, 가여워라. 세상은 암덩어리인 모양이다. TV나 신문 등 각종 뉴스는 온통 악으로 가득 차 있다. 설령 좋은 소식이 박터진다 한들, 일주일도 못 가 다시 시커먼 이야기로 뒤덮여버린다. 좋은 소식은 무슨 미니시리즈마냥 조그맣게, 나쁜 소식들이 미처 채우지 못한 한귀퉁이를 차지하고 있다. 아마 판도라의 상자에서 빠져나가지 않았(정확히는 '못했')던 '희망'의 면적만큼이 아닐까?

 그렇지만 단순히 TV를 틀고 있을 때 고정시켜놓으면 좋은 채널은 뉴스가 제일이다. 코미디는 시끄럽고, 다큐는 지루하며, 대개의 프로그램은 방청객 때문에 요란하다. 뉴스는, 아나운서가 절도있게 또박또박 말을 하고, 기자도 말을 절제해서 하기 때문에 훨씬 깔끔한 느낌이 난다.

 

 "우리나라가 12년 연속 OECD국가 중 자살률 1위라는 불명예를 얻었습니다. 작년에 비해 항우울제 처방은 약 00% 증가했으며.. 전문가들은.."

 

 소화제를 먹으니 좀 낫다만, 아직도 머리가 아프다. 회식하며 단합해야 한다고 연거푸 술잔을 주는 걸 거절하지도 못하고, '20대의 패기' 운운하면서 다 받았던 게 화근이다. 아직 젊어서 망정이지 좀 더 나이 들었으면 아마 이만큼도 회복하지 못했겠지. 우리 팀 사람들은 거의 다 주당인 것 같았다. 그래서 앞으로가 더 걱정이다. 마시다보면 는다고는 하는데, 그들은 마시면서 배운 게 아니라 술을 먹기 위해 태어난 족속 같았다.

 

 "70대 독거노인이 숨진지 일주일 만에 발견되었습니다. 그동안 이웃에 사는 어느 누구도 이 사실을 몰랐다고 합니다. 기자 연결해서 자세한 사항 알아보겠습니다."

 

 물을 벌컥벌컥 마시다가, 문득 탁자 위에 놓인 신문지에 눈길이 갔다. 한 주간 베스트셀러 목록이었는데, 1위로 '아프니까 청춘이다'가 몇 십주째 자기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이어서 '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이 그 뒤를 바짝 쫓고 있었고, 순위표 옆에는 '스펙푸어'라는 단어가 큼지막하게 제목으로 박힌 기사가 활자를 펼쳐놓고 있었다. 이젠 별의별 신조어가 다 나온다.

 

 "요즘 면접은 예전과 많이 달라졌습니다. 특별하게 보이기 위해 이색적인 아이디어들이 샘솟는 신입사원 면접 현장을, 기자가 밀착취재해봤습니다."

 

 시선을 내리자 원기회복을 돕는다는 약에 대한 신문광고가 실려 있었다. 신입공채와 회식자리가 많을 이맘때를 겨냥해서 그런지, 사진 속에는 잘 차려입은 직장인 남녀 여럿이 거의 비슷한 자세로 환하게 웃으며 '화이팅!'이란 동작을 취하고 있었다. 그리고 바로 그 위엔 '화이팅 대한민국'이라는 큼지막한 글자가 알알이 박혀 있었다. 눈의 초점을 살포시 내리자 [용기.포장]과, 부작용에 대한 경고문구가 길게 적혀 있었다: "부작용이 있을 수 있으니 첨부된 '사용상의 주의사항'을 잘 읽고, 의사.약사와 상의하십시오."

 

 "..소심하고 앞에 잘 나서지 못하는 성격이지만, 이를 극복하기 위해 피나는 노력을 하고 면접에 임했고, 면접관 분들도 그런 제 노력을 높게 사신 것 같습니다."

 

 그 순간, 기묘한 생각이 들었다. '용기'가 容器(Container)가 아니라 勇氣(Brave)로 인식된 것이다. 그리고 시선을 내리깔은 탓에, 광고사진 속에서 환하게 웃고 있는 사람들의 얼굴이 코 위로는 보이지 않게 되었다. 그렇게 인식되자 '이 웃음은 몇 %가 진짜일까?'라는 의문이 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미친 사람처럼 껄껄 웃었다. 동시에 겉잡을 수 없이 슬퍼졌다.

 勇氣로 포장한 채 사회로의 첫발을 내딛은 나, 혹은 20대들. 빚더미 속에서 대학을 마치고, 아우성 속에 취업에 성공하면 기성세대는 물론 같은 세대끼리의 치열한 경쟁이 우리 숨통을 죄고 있다. 그리고 나와 맞는 사람들만 있으면 좋으련만, 사회라는 게 꼭 그렇질 못하다. 안 맞는 사람과도 잘 어울릴 필요가 있다. 그러다보니 이따금 스트레스를 받고, 그런 척 안 그런 척. 종종 '포장'될 필요도 있는 것이다. 그 사이 마음은 점점 닳고 지치지만.

 가만. 마음이 맞는 동료라도 평소에 연락하고 지내는 사람은 몇이나 되던가? 동료들은 동료인 동시에, 승진을 염두에 두면 경쟁상대인 것이다. 처음엔 이렇게 생각하는 스스로가 참 싫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사고회로는 알아서 사회에 적응했다. 다른 사람들도 비슷하겠지. 사진 속에서 함께 화이팅을 외치는 저 사람들, 같은 회사에 같은 부서라면, 아마 속은 겉과 많이 다르지 않을까.

 

 "지난 6년 간 부녀자들을 공포에 떨게 했던 이른바 '발바리'가 붙잡혔습니다. 두 딸을 둔 가정의 평범한 가장으로 밝혀져 지역사회는 큰 충격에 휩싸였습니다."

 

 나는 용기로 포장된 삶에 지쳤다. "사용상 주의사항"이라도 있으면 좋으련만, 누가 그런 메뉴얼을 만들어주긴 하든가? 우후죽순 출판되어있는 '직장생활 끝장나게 잘하기'류의 책도 그저 참고일 뿐, 이정표 역할로서는 부족하다. 하긴, 의학의 결집체이자 증상에 따라 용도가 확실한 약품도, 사람에 따라서는 '의사 약사와 상의'해야 하는데. 사람 간의 일은 오죽할까.

 그래도 의사 약사는 동네 어딜 가나 있기나 하지, 용기로 포장된 '나'는 상의할 사람도 없다. 아하, 그래서 다들 책을 손에 잡고 위안을 얻으려 하는건가? 이 시대의 지성인들은 책을 통해 말을 건넨다. '아프니까 청춘이다'라면서. '빨리빨리'밖에 모르는 종족에게 '멈춰보세요. 그럼 다르게 보입니다.'라면서. 지속적으로 책이 팔리는 걸 보면, 우리네의 아픔을 잘 알고 제대로 어루만져주는 모양이다.

 

 "우리나라의 1인당 국민소득이 총..."

 

 TV의 전원을 꺼버렸다. 인근 도서관에 그 책들이 있으면 좋을 텐데. 십중팔구 대출 중일 거란 생각이 들었지만, 일단은 발걸음을 옮겼다.

'등산 여정 > 이미지' 카테고리의 다른 글

#2 불완전한 왕좌  (0) 2012.06.12
잃어버린 지하도  (2) 2012.06.03
#1 하늘  (0) 2012.05.31
신천 거리, MOT <카페인>  (0) 2012.04.26
화장-1: 04.23 아침의 의문  (0) 2012.04.25
Posted by 비류
|

 귀가조치로 군대에서 돌아온 뒤, 조용히 지내고 있다. 엄밀히 말하자면 '회복'도 겸하고 있다. 입대 전에 싹 다 정리하고 마음가짐도 다잡고 했는데, 돌아와버렸으니 허탈함이 여간 큰 게 아니었으니. 어쨌든 재신검+재입영 전까지는 복학도, 입대도 할 수 없기 때문에 '휴가' 혹은 '재도약' 기간으로 생각하고서, 서서히 생활을 잡아가는 중이다.

 생활의 기틀을 잡아가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하게 작용하고 있는 것은, 다름아닌 글쓰기이다. 스스로가 봐도 참 역설적이다. 입시 실패와 여러 사연으로 '글은 그저 취미수단'으로 생각하고 이전만큼 치열하게 쓰지도 않는데. 간혹 글쓰기를 지양하는 마음도 들곤 하는데(글을 위험하게 '휘둘렀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런데 회복의 기틀이다. 너털웃음이 나온다.

 그렇다면 어디서 글쓰기에 다시 자극을 받았던가, 되짚었다. 첫번째는 일기다. 입대 선물이라고 왕틴들이 돈을 모아 케이크와 일기장을 선물해주었다(선물은 동갑내기 친구가 고민고민하다가 기도하고 골랐다는데, 나도 모르게 내게 필요했던 것이었다. 할렐루야!). 가격을 떠나서, 굉장히 쓰고 싶게 생긴 일기장이다. 표지나, 속지나. 무게감도 적당하다. 게다가 이건 무슨 일이 있어도 집(혹은 그에 준하는)에서 쓰기로 정했기에, 독자를 최소한으로라도 의식하며 썼던 것과는 달리 정말 진솔하게 내면을 바라볼 수 있다.

 두번째는, 얼마 전 본 근대가무극 <윤동주, 달을 쏘다>의 영향이다. 극 전반에 걸쳐 시인으로서의 고뇌가 짙게 드러나있다. 자랑스럽게 내놓을 정도는 못 되지만, 소설을 써본 경험이 있어서 고뇌에 공감했었다. 당시 시대상까지 덧입히면, 아마 나와의 것과는 급이 달랐으리라. 또한, 모든 남자 주연들이 '시는 나에게 무엇인가'라는 가사가 들어간 곡을 부르는 장면이 몇 번 있는데 그게 깊게 뇌리에 남았다. 고등학교 시절 문학소년이었던지라, 그 자문에 대해 같이 가슴 뛰었던 기억이 난다. 연극은 8월 중순에 끝났지만, 여운은 아직까지도 남아있다.

 세번째는, 독서다. 요즘 김연수님 신작 <파도가 바다의 일이라면>을 읽고 있는데, 역량 있는 작가라 그런지(<세계의 끝 여자친구>를 꼭 읽어보시길!)순식간에 1/3을 읽었다. 그러면서 드는 충동 '나도 이런 읽을만한 이야기 하나 쓰고 싶다'. 꼭 김연수님이 아니라도 잘 쓴 이야기, 맛있게 읽을 수 있는 이야기를 접할 때마다 그런 충동이 든다. 아마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의 문청들이 공통적으로 겪는 증세 아닐까?

 

 여차저차한 이유가 나열되어 있지만, 근본적으로 '버릇'이 되어버렸기 때문이 아닐런지. 제버릇은 남 못 준다고, 중고등학교 4년간 치열하게 글 하나 바라보며 살았던 문청시절의 선연한 흔적이, 지금까지도 살아 숨쉬는 것이라 생각한다. 결국은 떼어놓질 못하는구나, 글쓰기를.

 글쓰기는 늘 어렵지만 또 좋고, 재밌기도 하다. 늘 첫대면 같다.

Posted by 비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