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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Fiction입니다. 참조 이미지: http://thehobbit.tistory.com/166)

 

A에게

 이거 기억 나? 작년인가 찍었던 것 같은데. 사진 정리하다보니 이게 나오더라. 네가 가장 좋아하는 장소인 '아지트'에서 찍은 거야. 우리가 함께 한 2년 동안, 이 장소에 대한 추억이 제일 많았다는 생각이 들어. 남들이 모르는 내밀한 사연들도 여기 녹아있고.. 아마 학교를 졸업하고 나서도 이곳은 계속 기억나지 않을까 싶네. 상념에 잠겨 사진을 보고 있으려니까, 네게 편지를 보내고 싶어졌어. 아마 마지막으로 하는 긴 이야기일거라 생각해서. 네가 들어주었으면 하는 것과 인지해주었으면 하는 이야기가, 좀 있어.

 너의 '아지트'는 참 신비한 곳이야. 앞으로도 이런 장소는 찾기 힘들 거야. 학교에 분명히 존재하는 장소인데 여길 아는 사람은 매우 드물어. 입구라는 게 있긴 하지만 개구멍 같이 작아서 보이지도 않고. 그런데 역설적인 건, 후미진 데 있기 때문에 이 근처에선 이 곳만 보게 돼. 떠올려봐. 주변은 다 컴컴한데 우리가 앉았던 소파 쪽만 환하잖아. 너는 그게 매력이라고 했지. 2년 간 함께하면서, 너는 '형태'가 너무 강하다는 느낌을 쭉 받았어.

 무슨 이야기냐고? 그야. 이 곳의 형태가 너를 잘 반영하고 있는 것 같아서. 어두컴컴한 복도가 있고, 바닥에는 지하주차장 같이 일정 간격으로 흰 줄이 여럿 그어져 있고, 소파가 위치한 면에는 새하얀 자갈이 어지러이 깔려 있고.

 여기로 오는 입구는 분명 누구에게나 열려 있지만, 찾기가 쉽지 않지. 너도 그래. 다가가려 해도 좀처럼 들어가긴 힘들어. 간신히 들어왔더니 칠흑 같은 어둠이 몸을 감싸. 초반에 '잘못 다가간 게 아닌가'를 고민 많이 했어.

 빛을 찾아서 밝은 쪽으로 나오면, 소파에 네가 앉아있어. 그리고 고개만 빼꼼 내밀고선, 다가오려는 나를 물끄러미 바라봐. 너는 게임하듯이 1번 선, 2번 선, 3번 선으로 구분을 두는데, 네 마음대로 몇 번 선에 머무르게 할지를 정해.

 그리고 모든 단계를 통과하고 난 뒤엔 이 지면에 올 자격이 주어졌어. 문제는 여기가 하얀 자갈밭이라는 거야. 하얀 자갈들은, 겉으로 보기엔 엄청 예쁘고 좋아보이지만 실제론 뾰족뾰족해서, 네가 자갈을 치워 길을 열어주지 않으면 갈 수 없었어. 헛디뎌 넘어지기라도 하면 심하게 다치고 말이야.

 이것마저도 통과한 뒤엔, 드디어 '소파'에 앉을 기회가 주어졌어. 그래서 함께 공간을 나누고, 즐길 수 있었지. '소파'에 도달했다는 생각에 기쁘고 감사했어. 정말 힘들었거든. 말도 못하게 아프고 괴로웠거든. 너를 워낙 좋아해서 이에 대해 자부심도 느꼈고.

 하지만 최근에서야 깨달았어. '소파'에는 너밖에 올 수 없어. 내가 '소파'라고 생각하고 다가갔던 네 마음 속은, 실은 '왕좌'였던 거야. 너만의 왕좌. 네가 나눠줄 자리는 없어. 그렇지?

 나는 아직도 네 곁이 그립고, 그것 때문에 많이 힘들어. 하지만 왕좌에 머무르려 하면 서로에게 더 깊은 상처를 줄 것 같아서, 헤어지기로 한 거야. 어쩌면.. 너는 실낱 같은 상처조차 받지 않았을지도.

 '우린 하나'라고 생각하고 기뻐할 땐 좋았는데. 지금 보니 결국 타인이구나. 네 마음을 알 수가 없으니.

 

 너의 왕좌에서 내려와.

 2년 씩이나 교제했으면서도 나는 내게 어떤 상처가 있고 어떤 슬픔을 간직하고 있는지 몰라. 네가 거기 갇혀서 이야기하기를 거부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해. 너는 착각하고 있어. 거기 앉아서 아무도 오지 못하게 막는다고 해도 결국 상처입게 될 거야. 스스로가 내는 상처에 더 아프게 될 거야.

 

 우리 모두는 상처입고, 불완전하기 때문에 살아가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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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비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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