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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실'에 해당되는 글 1건

  1. 2012.06.03 잃어버린 지하도 2

(이 내용은 Fiction임을 알려드립니다. 참조사진: http://thehobbit.tistory.com/152)

 

 아아, 어지럽다. 아무래도 너무 많이 마셨나보다. 내가 지금 어떤 상태인지, 그리고 이렇게 생각을 전개할 수 있는 걸 보면 멀쩡한 거 같은데. 시야는 격하게 흔들리고, 머리는 지끈거리고 속은 메슥거린다. 그래서 알게 되었다. 너는 취했다. 아주 많이. 그런데도 용케 걸어가고 있는 스스로가 ...신기하다. '대견(Proud)'라는 단어를 쓰려다가, 지금 내 처지가 대견(大犬)처럼 느껴져서 '신기하다'는 말로 바꾸었다.

 심야. 깊은 밤. 밤 하면 어둠. 어둠하면 고요. 침묵. 공포. 공포는.. 어.. 제출기한이 내일인 서류들. 받아들고서 또 종잇장처럼 구겨질 부장님 얼굴. 얼굴하면 거울. 거울은 유리.. 잠깐. 이러다간 끝도 없겠다. 내가 무슨 생각을 하려 했더라? 맞아. 심야. 심야였지.

 심야는 깊은 밤. 밤 하면 어둠. 어둠하면 고요. 침묵인데, 도심에는 '심야'라는 개념이 없는 것 같다. 대낮보다 더 형형색색으로 황황한 거리. 밤이 오면 '어둠이 내려앉다'는 표현을 쓰는데, 도심에서는 '하늘이 검게 변하고 달이 떴다'로 표현하는 게 옳을 듯 싶다. 하늘색이 달라졌을 뿐, 여전히 클랙슨 소리가 가득하다. 차는 더욱 빨리 달린다. 더 많은 사람들이 무리지어 돌아다닌다. 이 시간쯤 되면 대견(大犬)스러운 사람들도 보인다. 나처럼. 아니, 사람이라는 호칭이 맞긴 맞는 건지...

 우측보행을 하고 싶어도 지그재그로 걸을 수 밖에 없었는데, 비틀대다가 반가운 구멍을 만난다. 지하도다. 계단이 평소보다 세 배는 많다. 왜? 정상적으로 보이질 않으니까. 내려간다. 횡단보도는 싫다. 교복 입은 학생들도 그냥 데려가려는 삐끼들은 더 싫다. 어슬렁거리다가 회사 사람을 만나는 건 생각하고 싶지도 않다.

 계단을 내려가는 내 다리가 세 개. 그 세 개의 다리가 세 개의 계단을 딛는다. 새로운 세개로의 도약. 무엇이 무엇이 똑같을까? 다리 세 짝이 똑같아요. 예? 다리가 세 개라구요? 네 그렇습니다. 장난 치지 마세요. 다리는 두 개에요. 사고를 당해서 절단했다해도, 아예 없거나 하나가 전부라구요. 무식하시긴. 이게 바로 최신기술, 3D입체영상입니다. (당신의 돈을)사랑합니다 고갱님, 입구에 비치된 안경을 착용해주세요.

 불현듯 내 개그에 웃음이 폭발에 낄낄거렸다. 이윽고 중심을 잃고 아래로 처박혔다. 둔탁한 소리가 몇 번 나더니, 차가운 돌바닥과 입맞춤을 하고 있었다. 어, 이건 너무한데. 좀 더 로맨틱한 분위기에서 해야 하는 거 아니야?

 입술을 떼고도 잠시. 흔들리던 시야가 정리되고, 통증이 지끈거림을 압도하면서 생각이 또렷해진다. 천장이 보인다. 아마도 청소를 한지 꽤 오래됐을, 거무튀튀한 지하도 천장. 옷은 이미 더러워졌다. 아예 대자로 뻗어버렸다.

 안녕. 이렇게 만나는 것도 오랜만이구나. '내 공간' 그 곳은 아니지만.

 

 나는 어렸을적부터 지하도를 무척 좋아했다. 집 근처에 거대한 지하도가 있었는데, 시간 나면 그곳에서 놀곤 했다. 각 구역마다 특징이 있었고, 특징에 따라 고유한 이름을 붙이고 머무르곤 했다. 예를 들면 여기는 넓으니까 '브로드웨이', 저기는 계단 하나가 금이 가 있으니까 '감기 걸린 계단', 거기는 비가 오면 양 옆으로 물이 흐르니까 '시냇물'...

 부모님 품을 떠나서는 처음으로, 세상에 대해 알려주는 교과서. 교과서 속 그림에는 횡단보도나 육교만 있었지, 지하도는 없었다. 그래서 '내 공간'을 더 특별하게 여겼다. 모든 것을 다 알고 계시는 선생님도, '내 공간'은 모르실 거라 생각했다. 그래서 묻지 않았다. 아니, 실은 혹시라도 알게 되는 게 두려웠다. 나는 '비밀'이란 단어를 알기도 전에 이미 비밀을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점점 자라면서 '친구'가 생기게 되었고, 정말 소중한 것을 함께 하고 싶은 친구가 있으면 지하도로 데려왔다. 그리고 곳곳을 구경시켜주었다. 친구들은 '내 공간'에 감탄했고, 나는 우쭐대며 신나게 떠들었다. 관광이 끝나고 나면 두셋이서 공기놀이를 하거나, 딱지치기를 하거나,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같은 놀이를 즐겼다.

 이따금 나타나는 '수상한 사람'들은 내게 신비한 존재였다. 대개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내 공간'에 들어왔다는 사실 자체가 신기했다. 그래서 다시 지상으로 올라갈 때까지 뒤에서 몰래 훔쳐보기도 하고, 길을 알려달라고 해서 다른 출구까지 바래다 준 적도 있다. 어쩌다, 무엇을 하기 위해 왔는지 궁금했지만 묻지 않았다. 내게 관심을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좀 더 머리가 커져서 '내 공간'이 어디에나 있을법한 <지하통로>라는 걸 알게 된 뒤에도, 지하도에 오기를 계속했다. 대개는 힘든 일이 있을 때 왔다. 성적이 떨어져 집에 들어가기 두려울 때, 친구와 싸워서 몸과 마음이 상했을 때, 다 때려치우고 그냥 어디론가 떠나고 싶을 때. 때. 때. 그런 힘든 순간에 이곳에 오면 나도 모르게 금세 편안해졌다. 어느 날은 벽에 기대 노상에서 잠든 적도 있었다.

 고등학교 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사귄 여자친구도 '내 공간'에 데려왔다. 처음엔 그저 지나가기 위한 통로로 생각하고 순순히 따라들어왔던 그녀는, 더 깊이 들어가자 불안한 기색을 보였다. 그래서 이곳이 어떤 의미를 지니는 곳인지, 왜 데려왔는지를 설명해주었는데도 여전히 불안해했다. 이를 가만히 보다가 깊은 모멸감을 느꼈다. 내가 자기에게 음험한 짓을 할 거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나에게 가장 소중한 장소를 그저 '나쁜 짓 할법한 장소'로 받아들였다는 게, 혐오스럽기까지 했다. 그 길로 바로 집에 데려다주고, 서서히 연락을 줄여가다가 헤어졌다. 지금 생각하면 과잉반응이었지만, 당시 선택에 대해 후회는 없다.

 그리고 군 입대 전, 그 곳은 인근 지하철 역사와 연결되면서 구조가 변했다. 공사가 끝난 뒤 딱 한 번, 혹시라도 무언가 남아있을까 싶어서 갔었다.  '감기 걸린 계단'도, '시냇물'도, 그 외 내가 애정어린 시간을 보냈던 장소가 모두 변해버렸다. 끈이 끊어진 헬륨풍선 같은 마음으로 뒤돌아나오던 그 순간. 회상하면 아직도 너털웃음밖에 나오지 않는다, 그렇게 '내 공간'을 잃었다.

 제대한 뒤 복학하고, 학교를 졸업하고,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적응하랴, 학점 따랴, 졸업논문쓰랴, 취직자리 알아보랴, 정신없이 달렸다. 그리고 한숨 돌리자마자 망가지기 시작했다. 알 수 없는 공허함이 나를 뒤덮었다. 분명히 남들 부럽지 않게 좋게 출발해서 자리 잡아가고 있는데, 왜 그럴까? 알지 못했다. 그래서 회사생활을 더 열심히 해보기도 하고, 취미에 몰두해보기도 하고, 술독에 빠지기도 했다. 그런데도 여전히 공허하고 힘들었다.

 술과 다리 세 개로 새로운 세계에 도착한 오늘, 비로소 알게 되었다. 채우려 하면 할수록,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점점 더 커지기만 하는 이 구멍이 무엇 때문에 생기는지를.

 

 돌아갈 곳이 없다는 건 참 슬픈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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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비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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