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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산 여정/이미지'에 해당되는 글 7건

  1. 2012.09.11 빈 용기. 과대포장.
  2. 2012.06.12 #2 불완전한 왕좌
  3. 2012.06.03 잃어버린 지하도 2
  4. 2012.05.31 #1 하늘
  5. 2012.04.26 신천 거리, MOT <카페인>
  6. 2012.04.25 화장-1: 04.23 아침의 의문
  7. 2012.04.19 옥상정원, 소설 한 편, 그리고 새 카테고리.

(이 글은 Fiction임을 알려드립니다.)

참조사진: http://thehobbit.tistory.com/199


 "식약청 조사 결과 대부분의 제약회사들이 TV나 신문 등에 과대.과장광고를 하고 있는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주로 성분을 늘리거나 줄이는 수법을 써서 소비자들을 속여왔습니다."

 TV에서 또 달갑지 않은 뉴스가 흘러나왔다. 어제 회식자리의 후유증을 해소하기 위해, 광고를 보고 소화제를 하나 사먹었기 때문이다. 차라리 몰랐으면 속 편했을걸. 괜히 틀어놨다. 그래도 끄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끄면 공허하다. 자취생활 시작하면서부터 혼자인 시간이 압도적으로 많아졌다. 그때문에 자주 외로워지고, 사람이 그립다. 처음 한 주는 내 시간, 내 공간이 주어졌다는 사실에 기뻐했으나, 이젠 처절하게 혼자라는 사실이 심술궂게 속을 뒤집어놓는다.

 

 "'왕따'가 직장 내에서도 심각한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전문설문조사업체와 본 방송국이 직장에 다니는 성인남녀 0000명을 대상으로 설문을 실시한 결과...."

 

 뉴스. NEWS. North East West South. 사방의 소식을 전하는 매체. 혼자 사는 세상이 아니기 때문에, 그리고 나는 지금 혼자이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의 삶은 어떤지, 그리고 함께 살아가야 하는 이 세계는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알 필요가 있다. 하지만 나는 뉴스를 좋아하지 않는다. 통신매체의 발달로 사방의 소식은 물론 지구 반대편 소식까지 생생하게 전해주는 뉴스 본연의 목적에는 참 충실해졌으나, 가여워라. 세상은 암덩어리인 모양이다. TV나 신문 등 각종 뉴스는 온통 악으로 가득 차 있다. 설령 좋은 소식이 박터진다 한들, 일주일도 못 가 다시 시커먼 이야기로 뒤덮여버린다. 좋은 소식은 무슨 미니시리즈마냥 조그맣게, 나쁜 소식들이 미처 채우지 못한 한귀퉁이를 차지하고 있다. 아마 판도라의 상자에서 빠져나가지 않았(정확히는 '못했')던 '희망'의 면적만큼이 아닐까?

 그렇지만 단순히 TV를 틀고 있을 때 고정시켜놓으면 좋은 채널은 뉴스가 제일이다. 코미디는 시끄럽고, 다큐는 지루하며, 대개의 프로그램은 방청객 때문에 요란하다. 뉴스는, 아나운서가 절도있게 또박또박 말을 하고, 기자도 말을 절제해서 하기 때문에 훨씬 깔끔한 느낌이 난다.

 

 "우리나라가 12년 연속 OECD국가 중 자살률 1위라는 불명예를 얻었습니다. 작년에 비해 항우울제 처방은 약 00% 증가했으며.. 전문가들은.."

 

 소화제를 먹으니 좀 낫다만, 아직도 머리가 아프다. 회식하며 단합해야 한다고 연거푸 술잔을 주는 걸 거절하지도 못하고, '20대의 패기' 운운하면서 다 받았던 게 화근이다. 아직 젊어서 망정이지 좀 더 나이 들었으면 아마 이만큼도 회복하지 못했겠지. 우리 팀 사람들은 거의 다 주당인 것 같았다. 그래서 앞으로가 더 걱정이다. 마시다보면 는다고는 하는데, 그들은 마시면서 배운 게 아니라 술을 먹기 위해 태어난 족속 같았다.

 

 "70대 독거노인이 숨진지 일주일 만에 발견되었습니다. 그동안 이웃에 사는 어느 누구도 이 사실을 몰랐다고 합니다. 기자 연결해서 자세한 사항 알아보겠습니다."

 

 물을 벌컥벌컥 마시다가, 문득 탁자 위에 놓인 신문지에 눈길이 갔다. 한 주간 베스트셀러 목록이었는데, 1위로 '아프니까 청춘이다'가 몇 십주째 자기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이어서 '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이 그 뒤를 바짝 쫓고 있었고, 순위표 옆에는 '스펙푸어'라는 단어가 큼지막하게 제목으로 박힌 기사가 활자를 펼쳐놓고 있었다. 이젠 별의별 신조어가 다 나온다.

 

 "요즘 면접은 예전과 많이 달라졌습니다. 특별하게 보이기 위해 이색적인 아이디어들이 샘솟는 신입사원 면접 현장을, 기자가 밀착취재해봤습니다."

 

 시선을 내리자 원기회복을 돕는다는 약에 대한 신문광고가 실려 있었다. 신입공채와 회식자리가 많을 이맘때를 겨냥해서 그런지, 사진 속에는 잘 차려입은 직장인 남녀 여럿이 거의 비슷한 자세로 환하게 웃으며 '화이팅!'이란 동작을 취하고 있었다. 그리고 바로 그 위엔 '화이팅 대한민국'이라는 큼지막한 글자가 알알이 박혀 있었다. 눈의 초점을 살포시 내리자 [용기.포장]과, 부작용에 대한 경고문구가 길게 적혀 있었다: "부작용이 있을 수 있으니 첨부된 '사용상의 주의사항'을 잘 읽고, 의사.약사와 상의하십시오."

 

 "..소심하고 앞에 잘 나서지 못하는 성격이지만, 이를 극복하기 위해 피나는 노력을 하고 면접에 임했고, 면접관 분들도 그런 제 노력을 높게 사신 것 같습니다."

 

 그 순간, 기묘한 생각이 들었다. '용기'가 容器(Container)가 아니라 勇氣(Brave)로 인식된 것이다. 그리고 시선을 내리깔은 탓에, 광고사진 속에서 환하게 웃고 있는 사람들의 얼굴이 코 위로는 보이지 않게 되었다. 그렇게 인식되자 '이 웃음은 몇 %가 진짜일까?'라는 의문이 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미친 사람처럼 껄껄 웃었다. 동시에 겉잡을 수 없이 슬퍼졌다.

 勇氣로 포장한 채 사회로의 첫발을 내딛은 나, 혹은 20대들. 빚더미 속에서 대학을 마치고, 아우성 속에 취업에 성공하면 기성세대는 물론 같은 세대끼리의 치열한 경쟁이 우리 숨통을 죄고 있다. 그리고 나와 맞는 사람들만 있으면 좋으련만, 사회라는 게 꼭 그렇질 못하다. 안 맞는 사람과도 잘 어울릴 필요가 있다. 그러다보니 이따금 스트레스를 받고, 그런 척 안 그런 척. 종종 '포장'될 필요도 있는 것이다. 그 사이 마음은 점점 닳고 지치지만.

 가만. 마음이 맞는 동료라도 평소에 연락하고 지내는 사람은 몇이나 되던가? 동료들은 동료인 동시에, 승진을 염두에 두면 경쟁상대인 것이다. 처음엔 이렇게 생각하는 스스로가 참 싫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사고회로는 알아서 사회에 적응했다. 다른 사람들도 비슷하겠지. 사진 속에서 함께 화이팅을 외치는 저 사람들, 같은 회사에 같은 부서라면, 아마 속은 겉과 많이 다르지 않을까.

 

 "지난 6년 간 부녀자들을 공포에 떨게 했던 이른바 '발바리'가 붙잡혔습니다. 두 딸을 둔 가정의 평범한 가장으로 밝혀져 지역사회는 큰 충격에 휩싸였습니다."

 

 나는 용기로 포장된 삶에 지쳤다. "사용상 주의사항"이라도 있으면 좋으련만, 누가 그런 메뉴얼을 만들어주긴 하든가? 우후죽순 출판되어있는 '직장생활 끝장나게 잘하기'류의 책도 그저 참고일 뿐, 이정표 역할로서는 부족하다. 하긴, 의학의 결집체이자 증상에 따라 용도가 확실한 약품도, 사람에 따라서는 '의사 약사와 상의'해야 하는데. 사람 간의 일은 오죽할까.

 그래도 의사 약사는 동네 어딜 가나 있기나 하지, 용기로 포장된 '나'는 상의할 사람도 없다. 아하, 그래서 다들 책을 손에 잡고 위안을 얻으려 하는건가? 이 시대의 지성인들은 책을 통해 말을 건넨다. '아프니까 청춘이다'라면서. '빨리빨리'밖에 모르는 종족에게 '멈춰보세요. 그럼 다르게 보입니다.'라면서. 지속적으로 책이 팔리는 걸 보면, 우리네의 아픔을 잘 알고 제대로 어루만져주는 모양이다.

 

 "우리나라의 1인당 국민소득이 총..."

 

 TV의 전원을 꺼버렸다. 인근 도서관에 그 책들이 있으면 좋을 텐데. 십중팔구 대출 중일 거란 생각이 들었지만, 일단은 발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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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비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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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Fiction입니다. 참조 이미지: http://thehobbit.tistory.com/166)

 

A에게

 이거 기억 나? 작년인가 찍었던 것 같은데. 사진 정리하다보니 이게 나오더라. 네가 가장 좋아하는 장소인 '아지트'에서 찍은 거야. 우리가 함께 한 2년 동안, 이 장소에 대한 추억이 제일 많았다는 생각이 들어. 남들이 모르는 내밀한 사연들도 여기 녹아있고.. 아마 학교를 졸업하고 나서도 이곳은 계속 기억나지 않을까 싶네. 상념에 잠겨 사진을 보고 있으려니까, 네게 편지를 보내고 싶어졌어. 아마 마지막으로 하는 긴 이야기일거라 생각해서. 네가 들어주었으면 하는 것과 인지해주었으면 하는 이야기가, 좀 있어.

 너의 '아지트'는 참 신비한 곳이야. 앞으로도 이런 장소는 찾기 힘들 거야. 학교에 분명히 존재하는 장소인데 여길 아는 사람은 매우 드물어. 입구라는 게 있긴 하지만 개구멍 같이 작아서 보이지도 않고. 그런데 역설적인 건, 후미진 데 있기 때문에 이 근처에선 이 곳만 보게 돼. 떠올려봐. 주변은 다 컴컴한데 우리가 앉았던 소파 쪽만 환하잖아. 너는 그게 매력이라고 했지. 2년 간 함께하면서, 너는 '형태'가 너무 강하다는 느낌을 쭉 받았어.

 무슨 이야기냐고? 그야. 이 곳의 형태가 너를 잘 반영하고 있는 것 같아서. 어두컴컴한 복도가 있고, 바닥에는 지하주차장 같이 일정 간격으로 흰 줄이 여럿 그어져 있고, 소파가 위치한 면에는 새하얀 자갈이 어지러이 깔려 있고.

 여기로 오는 입구는 분명 누구에게나 열려 있지만, 찾기가 쉽지 않지. 너도 그래. 다가가려 해도 좀처럼 들어가긴 힘들어. 간신히 들어왔더니 칠흑 같은 어둠이 몸을 감싸. 초반에 '잘못 다가간 게 아닌가'를 고민 많이 했어.

 빛을 찾아서 밝은 쪽으로 나오면, 소파에 네가 앉아있어. 그리고 고개만 빼꼼 내밀고선, 다가오려는 나를 물끄러미 바라봐. 너는 게임하듯이 1번 선, 2번 선, 3번 선으로 구분을 두는데, 네 마음대로 몇 번 선에 머무르게 할지를 정해.

 그리고 모든 단계를 통과하고 난 뒤엔 이 지면에 올 자격이 주어졌어. 문제는 여기가 하얀 자갈밭이라는 거야. 하얀 자갈들은, 겉으로 보기엔 엄청 예쁘고 좋아보이지만 실제론 뾰족뾰족해서, 네가 자갈을 치워 길을 열어주지 않으면 갈 수 없었어. 헛디뎌 넘어지기라도 하면 심하게 다치고 말이야.

 이것마저도 통과한 뒤엔, 드디어 '소파'에 앉을 기회가 주어졌어. 그래서 함께 공간을 나누고, 즐길 수 있었지. '소파'에 도달했다는 생각에 기쁘고 감사했어. 정말 힘들었거든. 말도 못하게 아프고 괴로웠거든. 너를 워낙 좋아해서 이에 대해 자부심도 느꼈고.

 하지만 최근에서야 깨달았어. '소파'에는 너밖에 올 수 없어. 내가 '소파'라고 생각하고 다가갔던 네 마음 속은, 실은 '왕좌'였던 거야. 너만의 왕좌. 네가 나눠줄 자리는 없어. 그렇지?

 나는 아직도 네 곁이 그립고, 그것 때문에 많이 힘들어. 하지만 왕좌에 머무르려 하면 서로에게 더 깊은 상처를 줄 것 같아서, 헤어지기로 한 거야. 어쩌면.. 너는 실낱 같은 상처조차 받지 않았을지도.

 '우린 하나'라고 생각하고 기뻐할 땐 좋았는데. 지금 보니 결국 타인이구나. 네 마음을 알 수가 없으니.

 

 너의 왕좌에서 내려와.

 2년 씩이나 교제했으면서도 나는 내게 어떤 상처가 있고 어떤 슬픔을 간직하고 있는지 몰라. 네가 거기 갇혀서 이야기하기를 거부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해. 너는 착각하고 있어. 거기 앉아서 아무도 오지 못하게 막는다고 해도 결국 상처입게 될 거야. 스스로가 내는 상처에 더 아프게 될 거야.

 

 우리 모두는 상처입고, 불완전하기 때문에 살아가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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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비류
|

(이 내용은 Fiction임을 알려드립니다. 참조사진: http://thehobbit.tistory.com/152)

 

 아아, 어지럽다. 아무래도 너무 많이 마셨나보다. 내가 지금 어떤 상태인지, 그리고 이렇게 생각을 전개할 수 있는 걸 보면 멀쩡한 거 같은데. 시야는 격하게 흔들리고, 머리는 지끈거리고 속은 메슥거린다. 그래서 알게 되었다. 너는 취했다. 아주 많이. 그런데도 용케 걸어가고 있는 스스로가 ...신기하다. '대견(Proud)'라는 단어를 쓰려다가, 지금 내 처지가 대견(大犬)처럼 느껴져서 '신기하다'는 말로 바꾸었다.

 심야. 깊은 밤. 밤 하면 어둠. 어둠하면 고요. 침묵. 공포. 공포는.. 어.. 제출기한이 내일인 서류들. 받아들고서 또 종잇장처럼 구겨질 부장님 얼굴. 얼굴하면 거울. 거울은 유리.. 잠깐. 이러다간 끝도 없겠다. 내가 무슨 생각을 하려 했더라? 맞아. 심야. 심야였지.

 심야는 깊은 밤. 밤 하면 어둠. 어둠하면 고요. 침묵인데, 도심에는 '심야'라는 개념이 없는 것 같다. 대낮보다 더 형형색색으로 황황한 거리. 밤이 오면 '어둠이 내려앉다'는 표현을 쓰는데, 도심에서는 '하늘이 검게 변하고 달이 떴다'로 표현하는 게 옳을 듯 싶다. 하늘색이 달라졌을 뿐, 여전히 클랙슨 소리가 가득하다. 차는 더욱 빨리 달린다. 더 많은 사람들이 무리지어 돌아다닌다. 이 시간쯤 되면 대견(大犬)스러운 사람들도 보인다. 나처럼. 아니, 사람이라는 호칭이 맞긴 맞는 건지...

 우측보행을 하고 싶어도 지그재그로 걸을 수 밖에 없었는데, 비틀대다가 반가운 구멍을 만난다. 지하도다. 계단이 평소보다 세 배는 많다. 왜? 정상적으로 보이질 않으니까. 내려간다. 횡단보도는 싫다. 교복 입은 학생들도 그냥 데려가려는 삐끼들은 더 싫다. 어슬렁거리다가 회사 사람을 만나는 건 생각하고 싶지도 않다.

 계단을 내려가는 내 다리가 세 개. 그 세 개의 다리가 세 개의 계단을 딛는다. 새로운 세개로의 도약. 무엇이 무엇이 똑같을까? 다리 세 짝이 똑같아요. 예? 다리가 세 개라구요? 네 그렇습니다. 장난 치지 마세요. 다리는 두 개에요. 사고를 당해서 절단했다해도, 아예 없거나 하나가 전부라구요. 무식하시긴. 이게 바로 최신기술, 3D입체영상입니다. (당신의 돈을)사랑합니다 고갱님, 입구에 비치된 안경을 착용해주세요.

 불현듯 내 개그에 웃음이 폭발에 낄낄거렸다. 이윽고 중심을 잃고 아래로 처박혔다. 둔탁한 소리가 몇 번 나더니, 차가운 돌바닥과 입맞춤을 하고 있었다. 어, 이건 너무한데. 좀 더 로맨틱한 분위기에서 해야 하는 거 아니야?

 입술을 떼고도 잠시. 흔들리던 시야가 정리되고, 통증이 지끈거림을 압도하면서 생각이 또렷해진다. 천장이 보인다. 아마도 청소를 한지 꽤 오래됐을, 거무튀튀한 지하도 천장. 옷은 이미 더러워졌다. 아예 대자로 뻗어버렸다.

 안녕. 이렇게 만나는 것도 오랜만이구나. '내 공간' 그 곳은 아니지만.

 

 나는 어렸을적부터 지하도를 무척 좋아했다. 집 근처에 거대한 지하도가 있었는데, 시간 나면 그곳에서 놀곤 했다. 각 구역마다 특징이 있었고, 특징에 따라 고유한 이름을 붙이고 머무르곤 했다. 예를 들면 여기는 넓으니까 '브로드웨이', 저기는 계단 하나가 금이 가 있으니까 '감기 걸린 계단', 거기는 비가 오면 양 옆으로 물이 흐르니까 '시냇물'...

 부모님 품을 떠나서는 처음으로, 세상에 대해 알려주는 교과서. 교과서 속 그림에는 횡단보도나 육교만 있었지, 지하도는 없었다. 그래서 '내 공간'을 더 특별하게 여겼다. 모든 것을 다 알고 계시는 선생님도, '내 공간'은 모르실 거라 생각했다. 그래서 묻지 않았다. 아니, 실은 혹시라도 알게 되는 게 두려웠다. 나는 '비밀'이란 단어를 알기도 전에 이미 비밀을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점점 자라면서 '친구'가 생기게 되었고, 정말 소중한 것을 함께 하고 싶은 친구가 있으면 지하도로 데려왔다. 그리고 곳곳을 구경시켜주었다. 친구들은 '내 공간'에 감탄했고, 나는 우쭐대며 신나게 떠들었다. 관광이 끝나고 나면 두셋이서 공기놀이를 하거나, 딱지치기를 하거나,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같은 놀이를 즐겼다.

 이따금 나타나는 '수상한 사람'들은 내게 신비한 존재였다. 대개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내 공간'에 들어왔다는 사실 자체가 신기했다. 그래서 다시 지상으로 올라갈 때까지 뒤에서 몰래 훔쳐보기도 하고, 길을 알려달라고 해서 다른 출구까지 바래다 준 적도 있다. 어쩌다, 무엇을 하기 위해 왔는지 궁금했지만 묻지 않았다. 내게 관심을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좀 더 머리가 커져서 '내 공간'이 어디에나 있을법한 <지하통로>라는 걸 알게 된 뒤에도, 지하도에 오기를 계속했다. 대개는 힘든 일이 있을 때 왔다. 성적이 떨어져 집에 들어가기 두려울 때, 친구와 싸워서 몸과 마음이 상했을 때, 다 때려치우고 그냥 어디론가 떠나고 싶을 때. 때. 때. 그런 힘든 순간에 이곳에 오면 나도 모르게 금세 편안해졌다. 어느 날은 벽에 기대 노상에서 잠든 적도 있었다.

 고등학교 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사귄 여자친구도 '내 공간'에 데려왔다. 처음엔 그저 지나가기 위한 통로로 생각하고 순순히 따라들어왔던 그녀는, 더 깊이 들어가자 불안한 기색을 보였다. 그래서 이곳이 어떤 의미를 지니는 곳인지, 왜 데려왔는지를 설명해주었는데도 여전히 불안해했다. 이를 가만히 보다가 깊은 모멸감을 느꼈다. 내가 자기에게 음험한 짓을 할 거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나에게 가장 소중한 장소를 그저 '나쁜 짓 할법한 장소'로 받아들였다는 게, 혐오스럽기까지 했다. 그 길로 바로 집에 데려다주고, 서서히 연락을 줄여가다가 헤어졌다. 지금 생각하면 과잉반응이었지만, 당시 선택에 대해 후회는 없다.

 그리고 군 입대 전, 그 곳은 인근 지하철 역사와 연결되면서 구조가 변했다. 공사가 끝난 뒤 딱 한 번, 혹시라도 무언가 남아있을까 싶어서 갔었다.  '감기 걸린 계단'도, '시냇물'도, 그 외 내가 애정어린 시간을 보냈던 장소가 모두 변해버렸다. 끈이 끊어진 헬륨풍선 같은 마음으로 뒤돌아나오던 그 순간. 회상하면 아직도 너털웃음밖에 나오지 않는다, 그렇게 '내 공간'을 잃었다.

 제대한 뒤 복학하고, 학교를 졸업하고,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적응하랴, 학점 따랴, 졸업논문쓰랴, 취직자리 알아보랴, 정신없이 달렸다. 그리고 한숨 돌리자마자 망가지기 시작했다. 알 수 없는 공허함이 나를 뒤덮었다. 분명히 남들 부럽지 않게 좋게 출발해서 자리 잡아가고 있는데, 왜 그럴까? 알지 못했다. 그래서 회사생활을 더 열심히 해보기도 하고, 취미에 몰두해보기도 하고, 술독에 빠지기도 했다. 그런데도 여전히 공허하고 힘들었다.

 술과 다리 세 개로 새로운 세계에 도착한 오늘, 비로소 알게 되었다. 채우려 하면 할수록,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점점 더 커지기만 하는 이 구멍이 무엇 때문에 생기는지를.

 

 돌아갈 곳이 없다는 건 참 슬픈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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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비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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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하늘

등산 여정/이미지 2012. 5. 31. 10:22

참조 사진:

http://thehobbit.tistory.com/157

 

 좀 칙칙한 색을 띤 하늘. 금방이라도 비가 쏟아질 것 같이 먹구름이 잔뜩 끼어있다.

 

 "보고 싶다."

 창가에 걸터 앉은 내 친구는, 방금 그렇게 중얼거렸다.

 "누가?"

 "어머니, 아버지, 용수, 철민, 지선, 유준.. 다."

 "왜. 연락할까? 여기로 오라고?"

 "아니. 아니야."

 그는 대뜸 윤동주 시인의 <별 헤는 밤>을 읊기 시작했다.

 "..별 하나에 아름다운 말 한 마디씩 불러 봅니다. 소학교 때 책상을 같이했던 아이들의 이름과, 패, 경, 옥, 이런 이국소녀들의 이름과, 벌써 아기 어머니 된 계집애들의 이름과.."

 "야 임마. 아침인데 별이 어딨다고 별 타령이냐."

 나는 그렇게 핀잔을 주었지만, 그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었다.

 "너는 내 친구 맞지?"

 "그럼."

 

 그는 초점 없는 눈으로 창 밖을, 정확히는 아래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저기 꼬물꼬물 움직이는 게 다 사람이야. 다들 열심히 살고 있는 것 같아. 우리도 그렇고."

 "그치."

 "그런데 저 중에는 '믿는다'는 행위가 가능한 선한 사람이 몇이나 될까?"

 사람을 너무 좋아해서 탈인 이 친구는 얼마 전, 친하게 지내던 거래처 직원에게 큰 사기를 당했다. 결과로 그는 징계를 받았고, 열정적인 마음에 상처를 입었다.

 "글쎄. 없지 않을까? 야, 나도 믿지 마."

 그는 내 답이 마음에 들었는지 껄껄 웃었다.

 "어이, 개독교인. 하나만 묻자. 니네가 믿는 하나님이랑 예수는 우리를 사랑한다면서?"

 "그래."

 "그런데 삶은 참 팍팍하잖아. 꼭 내가 그런 일을 당해서가 아니라, 평소에도 말이야. 하루하루가 참 힘들잖아."

 "그렇지."

 "이게 사랑이냐? 너네 신은 변태야?"

 차근차근 설명하듯 이야기 해주려다 문득, 그럴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너네 신'이 아니래도. 그럴지도 몰라. 하나님은 질투하시는 분이라는 말이 성경에 있어. 우리 사랑을 받지 못해서 질투하신다고. 세상이 가면 갈수록 악해지고, 희망이 없어지는 까닭은, 우리가 하나님에게 의지하도록 하려는 걸지도."

 그는 특유의 웃음으로 말을 이었다.

 "네가 날 아무리 전도하려 해도, 난 종교 같은 덴 관심 없어. 신이 어딨다고."

 "몇 년 전만 해도 나도 그랬지. 그래서 네 심정이 이해가 간다."

 나는 그의 눈을 쳐다봤다.

 "어쨌든 세상에는 너를 사랑하는 존재가 있다는 사실 하나는 기억하길 바라. 네가 아무리 신을 믿지 않는다고 해도, 그거 하나는 정말 큰 위안이 될 테고, 언젠가는 하나님께 돌아올지도 모르지, 나처럼."

 "하여간 종교쟁이들은."

 그는 귀찮다는 듯 자리를 떴다.

 

 창 밖으로 넓게, 도시가 있다. 차가, 사람이, 비행기가, 왔다갔다한다. 그 풍경 위에 하늘이 펼쳐져 있다. 불현듯 먹구름이 좌우로 갈라진다. 강렬한 햇빛이 비친다. 길을 걸어가던 사람이 잠시 멈추고 하늘을 올려다본다. 그는 나를 보지 못하지만, 나는 그를 본다. 형언할 수 없는 복잡한 표정이다. 이윽고 다시 구름이 해를 가린다. 그는 가던 길을 걸어간다. 그러다 아쉬운 듯 하늘을 다시 올려다보고, 불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다.

 나는 그를 보며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괜찮아요, 지금 당장 보이는 건 먹구름 투성이인 하늘이지만, 잠깐 나타났던 '강렬한 햇살'은 언제나 당신을 비추고 있습니다."

 나는 그 자리에 서서, 한참동안 하늘을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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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사는 동네는, 모여서 술 먹고 놀만한 장소로 유명한 곳이다. 신천. 늦오후부터 사람의 왕래가 늘기 시작하고, 저녁엔 본격적으로 무리지어 여럿이 다니기 시작하고, 10시 이후엔 '삐끼'들이 손님을 끌기 시작한다. 그리고 여기저기서 술에 취해 비틀거리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같은 방향으로 가는 택시를 붙잡고.. 유흥가. 홍등가다. 신천은 '흥청망청'이라든가 '낄낄낄'이라든가, 그런 수식어가 잘 어울리는 분위기를 지니고 있다.

친구들과 모이면 나도 이 거리로 오긴 하지만, 밥 먹고 이야기하고 가끔 노래방 가는 데 그칠 뿐(요즘 들어는 뜸해졌다.)딱히 '유흥'은 잘 모른다.

 

 며칠 전 저녁에 신천 거리를 지나는데, 한 주점 앞에서 MOT의 <카페인>이 큰 소리로 재생되고 있었다. 고3때, 생일선물로 받은 MOT 1집에 있던 곡이라 귀에 익숙했다. 한 5분쯤 되는 곡인데, 지나갈 때는 마침 내가 가장 흥미롭게 듣는 부분이 흘러나왔다.

 

...늘 깨어있고만 싶어

모든 중력을 다 거슬러

날 더 괴롭히고 싶어

더 많은 허전함을 허전함을 내게..

 <카페인>에 대해 '스페이스 공감'에 나온 한 줄 해설을 보니 "잠과 중력 등 스스로를 속박하는 것들을 떨쳐내고자 하는 자유의지를 일상의 언어로 담백하게 표현했다."라고 적혀 있었다. 신천의 분위기와, 저 대목과, 해설.. 참 재밌다는 생각을 했다.

 비틀비틀, 2차 가자!, 헤헤헤, 낄낄낄, 이년아 저년아, 클럽 가실래요 싸게 해드릴게요 물 좋아요.. 번쩍번쩍, 휘황찬란, 흐느적흐느적, 우웩.우웩. 빵빵..

 

 밤새 깨어서 중력은 물론 시간도 거스르고 있는 사람들. 감당할 수 없는 술담배 그리고 약간의 환각제로 자기를 괴롭히고, 뒷길 모텔 어느 방 안에서 욕정 어린 몸짓을 나누며 뒤엉켜서, 행복하다고 착각하는 사람들. 그럴수록 더욱 깊어지는 허전함. 더 많은 허전함을 허전함을 내게.

 그리고 이는 모두, 속박하는 것들을.떨쳐내고자 하는 자유의지. <카페인>에 나오는 모든 고백(가사)은, 일상의 언어로.담백하게.이루어져 있다.

 

 아아 고거 참, 재밌네. 멋진 역설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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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2012.04.23

 아침 일찍에 집 근처 가까운 곳을 갔다 올 일이 있었다. 사람들을 만나야 했지만, 사회적 격식을 차릴 필요가 적은 이른 시간과, 관계였기 때문에 옷을 지극히 편하게 입었다. 추리닝에 반팔, 그리고 남방. 다시 말하자면 가벼운 산책 차림이었다. 그 장소는 걸어가기엔 너무 멀어서, 지하철을 타고 오갔다.

 모임이 끝나고 집 근처의 역에서 내려서 나왔다. 출근시간이라 아파트에서 많은 사람들이 나와 반대방향으로 가고(오고)있었다. 나도 계속 걸었다. 그러던 중 어떤 여성이 눈에 띄었다. 큰 키, 빼쩍 마른 몸, 갈색 생머리, 도화지 화장, 그리고 멀리서도 느껴지는 약간의 허영. 오랜만에 보는 특이한 종족이라 흘끔 쳐다봤다. 눈이 마주쳤는데, 짧은 순간에 많은 메시지가 내게 넘어온 느낌이었다.

 

 '나, 이만큼 꾸몄다. 이 정도면 예쁘다. 그래서 나는 당당하다. 어. 왜 너는 그렇게 안 꾸미지? 왜 그러고 다녀? 부끄럽지 않나?'

 

 이런 시선이 지나가고, 집에 와서는 그 순간에 대해 '?'만이 남았다. 상징적인 행동에 대해 너무 민감하게 반응한 것이라 치부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내가 생각하기 시작한 점은, 위와 같은 생각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에 대해서였다. 그러면서 '화장'에 대한 다양한 답변을 떠올렸다.

 답변을 참고해서 그 여자를, 아니 그 여자가 시선 속에 담았을만한 생각을 이해해보려 했지만, 끝까지 물음표가 남았다. 예쁘다는 인상도 그다지 못 받았고, 외모가 빼어나다는 생각으로 타인을 짓밟으려는 태도도 이해할 수 없었다.

 글쎄. 겉 껍데기는 꾸미기 나름인데. 동생이 공들여 화장하고 나간 날, 길거리에서 마주쳤는데 못 알아본 적이 있었다. 그리고 편하게 생각했던 여자'친구'가 화장을 하고 나와서 설렌 적이 있었다. 그날 집에 들어가서는 다시 둘 다 평소처럼 대했다. 왜? 화장이 해제 된 뒤(동생은 화장을 지웠고, 친구는 카톡으로 대화했다.)였으니까. 눈속임. 남자나 여자나 시각이 주요한 감각이기 때문에, 외모와 화장은 어느 정도 눈속임이 아닐까. 나는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늘 외모보다는 그 사람의 사람 됨됨이를 보려 한다.

 세상에는 워낙 다양한 사람들이 살고 있으니까, 그래. 외모에 천착하는 사람도 얼마든지 있겠지, 하면서 넘어가지만, 그런 사람들이 좀 안타깝다는 생각도 든다.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워'라고 말할 수 있고 이 가사가 공감을 받을 수 있는 이유는, 외모를 기준으로 비교했기 때문이 아니라 한 사람 한 사람의 됨됨이, 참된 속을 보고 말한 것이기 때문이다.

 껍데기로 자신을 드높이려는 그네들의 마음 속은 얼마나 드높아져 있을까. 항상 뻣뻣하게 목에 힘을 주고, 보여지기 위해 살아야 하는 속은. 그리고 집으로 돌아가 혼자 거울 앞에 앉아 화장을 지우고 난 뒤 드러난 자신의 진짜 얼굴을 봤을 때는, 무슨 기분이 들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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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 할당량을 다 채우고 어기적어기적 사무실로 올라갔다. 같이 일하는 친구가 월차 내서 더 힘든 하루였으니 나에겐 '좋은 휴식'이 필요했다. 자리에 가서 가져온 책을 집어들었다.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 그리고 다시 옥상으로 올라갔다.

 누군가의 꿈이었을 거다, 이 건물. 아무리 생각해도. 휘황하게 뭔가 거대하게. 내가 이해할 수 없는 사상도 깃들여 있겠지. 전체 건물 구성을 보면 아마 '복합체'를 생각했을 거다. 좀 더 오버하자면, 코스모폴리탄? 알다가도 모를 일이지. 현실은 암울하니까. 오늘 거대언론에서 작정하고 이곳을 타깃으로 삼았던데, 앞으로의 추이가 기대된다.

 

 하늘이 정말 맑았다. 무슨 푸른색 도화지 보는 것 마냥. 주변을 둘러봤다. 전 건물 옥상이 다 이어져 있는 구조. 바닥의 타일 하나하나도 꽤 공들여서 만든 느낌이 물씬 풍겼다. 생각을 반복했다.

 '이 건물, 아무리 생각해도 누군가의 꿈이었을 거다.'

 그런 누군가의 꿈이 깃든 공간에서, 자리를 잡고 책을 펴 읽기 시작했다. 앉으면 밑에 설치된 스피커에서 음악이 나오는, 발상이 좋은 벤치였다. ...가만히 앉아서 생각하기는 참 좋지만, 책 읽기에는 아무래도 불편하다는 감상이 남았다. 소설 도입부 배경은 눈 오는 겨울, 그리고 아주 고요하고, 애틋한 곳이었는데 의자 밑에선 산뜻하고 발랄한 음악이 흘러나왔으니. 결국 자리를 옮겼다. '음악벤치'로부터 좀 떨어진 곳으로.

 

 수목 옆에 긴 의자가 있어 거기 앉아 읽다가, 드러누웠다. 좋은 풍광이었다. 하늘은 기분 좋게 새파랬고, 구름은 한 점도 없고, 바람은 산들산들 불고, 그래서 허공에는 내 팔과, 팔이 떠받치고 있는 책이 펼쳐져 있을 뿐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파반느>를 읽으니, 소설이란 건 참 가소롭다는 생각이 들었다. 주인공의 의식 흐름을 보면, 세상에 오직 그만이 생각이 있고 의식 있는 것 같이 느껴진다. 이른바 중2병인가?

 나도 옥상정원에서 중2병에 걸렸기 때문에, 의식 과잉이 느껴지는 대목에선 나도 '소설 같이' 생각했다. 예를 들자면 이런 거:

 ..스물 한 살이라. '스무 살은 싱그러워보이는데 스물 한 살은 한풀 꺾인 느낌이 난다' 라고. 올해 초에 친구에게 보낸 편지 중에 그렇게 적었다. 그렇게 한풀 꺾인 나이에, 나는 돈벌이를 마치고 누군가의 꿈이고 이상이었을 공간에 누워 소설가의 꿈을 읽는다. 제목은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 주우욱은 와앙녀를 위이한 파반느으으으. 이름 멋지다. 그런데 나는 디에고 벨라스케스도 처음 들어봤고, 표지 그림이 <시녀들>이란 것도 책날개를 통해 알았고, 파반느가 어떤 음악 형식인지도 모른다. 들어본 적은 있지만.

 사실 주인공은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 그냥 그저 그런 소시민일 텐데, 소설로 옮겨 놓으니 그만한 사상가가 없다. 의식 과잉이라 어떤 대목에서는 좀 불쾌하기도 하다. 너만 주인공인 양. 이 책을 읽고 있는 나도 나라는 인생의 화자인데. 너와 다른 점이 있다면, 이끌어가시는 분은 따로 있다는 거 말이지.

 이내 덮어버렸다. 그래, 그거 하나는 인상깊더라. 인간을 두고 '코끼리 똥'이라고 하는 거. 결국 소설 속의 너도, 나도, 그리고 잘났다고 날고 기는 이런저런 인간도 모두 실은 코끼리 똥이다. 옆에서 날아오는, 나무에 주는 거름 냄새보다 더 독하고 역겨운, 똥일 수 있다.

 혼자, 재밌는 발상이라고 생각하고선 '한 편의 소설처럼'이란 카테고리를 만들었다(맨날 카테고리만 늘어간다..). 이 카테고리가, 공개설정으로 써서 함께 나눌 수 있는 것이 되길 소망해본다(늘 비공개로 일기만 쓰니까 방문자도 적고, 활동도 없는 거로 간주되어 친구들에게 초대장도 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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