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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 할당량을 다 채우고 어기적어기적 사무실로 올라갔다. 같이 일하는 친구가 월차 내서 더 힘든 하루였으니 나에겐 '좋은 휴식'이 필요했다. 자리에 가서 가져온 책을 집어들었다.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 그리고 다시 옥상으로 올라갔다.

 누군가의 꿈이었을 거다, 이 건물. 아무리 생각해도. 휘황하게 뭔가 거대하게. 내가 이해할 수 없는 사상도 깃들여 있겠지. 전체 건물 구성을 보면 아마 '복합체'를 생각했을 거다. 좀 더 오버하자면, 코스모폴리탄? 알다가도 모를 일이지. 현실은 암울하니까. 오늘 거대언론에서 작정하고 이곳을 타깃으로 삼았던데, 앞으로의 추이가 기대된다.

 

 하늘이 정말 맑았다. 무슨 푸른색 도화지 보는 것 마냥. 주변을 둘러봤다. 전 건물 옥상이 다 이어져 있는 구조. 바닥의 타일 하나하나도 꽤 공들여서 만든 느낌이 물씬 풍겼다. 생각을 반복했다.

 '이 건물, 아무리 생각해도 누군가의 꿈이었을 거다.'

 그런 누군가의 꿈이 깃든 공간에서, 자리를 잡고 책을 펴 읽기 시작했다. 앉으면 밑에 설치된 스피커에서 음악이 나오는, 발상이 좋은 벤치였다. ...가만히 앉아서 생각하기는 참 좋지만, 책 읽기에는 아무래도 불편하다는 감상이 남았다. 소설 도입부 배경은 눈 오는 겨울, 그리고 아주 고요하고, 애틋한 곳이었는데 의자 밑에선 산뜻하고 발랄한 음악이 흘러나왔으니. 결국 자리를 옮겼다. '음악벤치'로부터 좀 떨어진 곳으로.

 

 수목 옆에 긴 의자가 있어 거기 앉아 읽다가, 드러누웠다. 좋은 풍광이었다. 하늘은 기분 좋게 새파랬고, 구름은 한 점도 없고, 바람은 산들산들 불고, 그래서 허공에는 내 팔과, 팔이 떠받치고 있는 책이 펼쳐져 있을 뿐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파반느>를 읽으니, 소설이란 건 참 가소롭다는 생각이 들었다. 주인공의 의식 흐름을 보면, 세상에 오직 그만이 생각이 있고 의식 있는 것 같이 느껴진다. 이른바 중2병인가?

 나도 옥상정원에서 중2병에 걸렸기 때문에, 의식 과잉이 느껴지는 대목에선 나도 '소설 같이' 생각했다. 예를 들자면 이런 거:

 ..스물 한 살이라. '스무 살은 싱그러워보이는데 스물 한 살은 한풀 꺾인 느낌이 난다' 라고. 올해 초에 친구에게 보낸 편지 중에 그렇게 적었다. 그렇게 한풀 꺾인 나이에, 나는 돈벌이를 마치고 누군가의 꿈이고 이상이었을 공간에 누워 소설가의 꿈을 읽는다. 제목은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 주우욱은 와앙녀를 위이한 파반느으으으. 이름 멋지다. 그런데 나는 디에고 벨라스케스도 처음 들어봤고, 표지 그림이 <시녀들>이란 것도 책날개를 통해 알았고, 파반느가 어떤 음악 형식인지도 모른다. 들어본 적은 있지만.

 사실 주인공은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 그냥 그저 그런 소시민일 텐데, 소설로 옮겨 놓으니 그만한 사상가가 없다. 의식 과잉이라 어떤 대목에서는 좀 불쾌하기도 하다. 너만 주인공인 양. 이 책을 읽고 있는 나도 나라는 인생의 화자인데. 너와 다른 점이 있다면, 이끌어가시는 분은 따로 있다는 거 말이지.

 이내 덮어버렸다. 그래, 그거 하나는 인상깊더라. 인간을 두고 '코끼리 똥'이라고 하는 거. 결국 소설 속의 너도, 나도, 그리고 잘났다고 날고 기는 이런저런 인간도 모두 실은 코끼리 똥이다. 옆에서 날아오는, 나무에 주는 거름 냄새보다 더 독하고 역겨운, 똥일 수 있다.

 혼자, 재밌는 발상이라고 생각하고선 '한 편의 소설처럼'이란 카테고리를 만들었다(맨날 카테고리만 늘어간다..). 이 카테고리가, 공개설정으로 써서 함께 나눌 수 있는 것이 되길 소망해본다(늘 비공개로 일기만 쓰니까 방문자도 적고, 활동도 없는 거로 간주되어 친구들에게 초대장도 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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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비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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