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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로몬의 타락: 늘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기억해야만 죄의 유혹을 이길 수 있다(본문 왕상 11:9-13).

 

 예루살렘 성전을 건축하고, 하나님이 주신 지혜로 나라를 잘 다스렸던 솔로몬이 훗날 타락하게 된다. 죄의 유혹을 받는 것과 유혹에 넘어가 죄짓는 것은 다르다. 죄의 유혹은 누구나 받을 수 있다. 심지어 예수님도 마귀의 유혹을 받았다. 유혹받을 때 단호히 믿음을 지키는 것이 중요하다. 유혹을 극복하는 방법은 무엇인가? 본문에 보면, 하나님이 솔로몬에게 '두 번이나 나타나셨다'고 한다. 특별한 은혜를 체험한 것이다. 그가 타락한 이유는 그 같은 은혜를 기억하지 못했던 탓이다. 은혜를 기억할 때 죄의 유혹을 이길 수 있다.

 모세는 '어리석고 지혜 없는 백성아 여호와께 이같이 보답하느냐 그는 네 아버지시요 ...(신 32:6)'라고 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이 우리 아버지가 되심을 상기시킨다(고후 6:17-18). 하나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우리를 사랑하신다. 이런 사랑을 기억한다면 죄지을 수 없을 것이다(요일 3:1-3).

 

생명의말씀사 <굿데이 성경> 개역개정4판 발췌

Posted by 비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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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적 싸움: 믿음과 인내만이 영적 싸움에서 연속적인 승리를 거둘 수 있게 해준다(본문: 여호수아 10:6-14).

 여호수아가 이끄는 이스라엘 군대는 하나님으로부터 승리를 보장받았지만, 그 약속을 이루기 위해 계속해서 싸워야 했다. 기브온 전투가 그 대표적 사례이다. 여호수아는 이미 이긴 전투이지만 가나안 다섯 족속의 동맹군을 물리치기 위해 하나님께 기도하며 태양의 움직임까지 정지시켜 놓고 끝까지 전투를 벌여야 했다. 이와 같은 일련의 사건은 영적 싸움의 성격을 잘 드러내준다.
첫째, 하늘나라의 약속과 그리스도의 승리가 확정되었지만, 마지막 승리를 거둘 때까지 계속해서 싸워 나가야 한다는 사실이다.
 둘째, 마귀가 모든 악의 세력을 규합하여 공격해오더라도(벧전 5:8)믿음으로 능히 이길 수 있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셋째, 구원은 이론적인 교리가 아니라 계속되는 경험임을 확신해야 한다. 기브온에서의 승리는 오직 믿음과 인내만이 영적 싸움에서 연속적인 승리를 거둘 수 있게 해준다는 교훈을 보여준다.

 

-생명의말씀사 <굿데이 성경> 개역개정4판에서 발췌

Posted by 비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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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 아침, 입에서는 한숨과 욕이 나오면서도 머릿속으로는 '아, 그런데 이 상황은 어떻게 감사하면 좋지? 감사할 부분을 궁리해봐도 짜증만 나는데..'라는 고민을 하는 스스로를 발견하고 참 많이 놀랐다. 어떤 상황이었는지 적어두고자 한다.


 어제는 굉장히 늦게 잤다. 2시 즈음 잠들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새벽기도를 가려면 5시, 늦어도 5시 반에는 일어나야 했기 때문에 바짝 긴장한 상태로 잠들었다. 그게 효과가 있긴 했는지 4시 50분에 깼다. 그러나 '10분만 더'라고 생각하다가 결국 7시에야 일어나고 말았다. 기도회는 이미 끝났고, 1시간 뒤에 있는 헤드회의도 제시간에 갈 수 있을지 아슬아슬한 상황이었다. 집에서 사무실까지 45분 정도 걸리니까.

 황급히 나갈 채비를 하고 현관으로 뛰쳐나갔는데, 나가려고 신발을 신는 찰나 동생이 맞춰놓은 알림이 울렸다. 방문을 열고 일어나는 걸 확인한 뒤 집을 나섰다. 그런데 아뿔싸, 1초의 차이로 엘리베이터가 내려가버렸다. 게다가 그리 높은 층도 아닌 3층에서 서는 것이 아닌가. 속에서 이것저것 여러 생각이 들끓었다. 물론, 좋지 않은 감정이었다.

 마음을 달래고, 1층에 내리자마자 황급히 버스정류장으로 달렸다. 나오기 전에 버스어플로 도착예정시간을 확인했던 바, 거의 근접했기 때문에 일단 달렸다. 그런데 근접해도 너무 근접해있었다. 정류장이 보이는 길로 나오자 이미 버스가 정류장을 향해 가고 있었다. 승객이 한 명 있었기에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계속 달렸는데, 버스기사 아저씨는 승차 문 근처까지 온 나를 발견하지 못하고 그냥 휑 떠나버렸다.

 이 시간대 버스 배차간격은 8~10분. 환승할 5호선은 배차간격 10분. 지각은 거의 따놓은 당상이었다. 내가 아침에 일찍 일어나서 새벽기도를 가지 못한 게 문제였으나(헤드회의는 새벽기도를 나온다는 전제 하에 그 시간에 진행되니까.), 한편으론 그 몇 초가 정말 화가 났다. 동생을 깨우지 않았으면 엘리베이터를 잡을 수 있었을 텐데. 3층에서 누르지 않았다면 잡을 수 있었을 텐데. 버스가 몇 초 더 기다려주었다면 타고 갈 수 있었을 텐데. 입에서 한숨과 욕이 나왔다.

 다음 순간, '그런데 이걸 어떻게 감사의 제목으로 삼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스스로도 정말 놀라운 발상이었다. 지부사역으로 섬기는 교회의 2013년 표어가 '감사하면 행복합니다'라서 평소에도 감사노트를 적고 있긴 했다. 그런데 이렇게 실제적으로 사고의 변화가 일어난 것을 확인하니, 그저 놀라울 따름이었다.

 이런 태도가 하나님 보시기에 마음에 들었는지 모르겠지만, 다행히 회의는 딱 5분 늦었다. 그 5분도 서로 이런저런 이야기 나누느라 정식으로 시작되진 않은 상태였다. 그때 깊이 감사했다(웃음).

 앞으로도 감사를 삶의 원동력으로 삼으며, 건강한 마음을 가질 수 있길 바라고 기도해야겠다. ^^

Posted by 비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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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티스토리 메인에 보니 '예수덕후의 7가지 특징'이란 글이 올라와있었다. 인터넷 하다보면 어느 순간 안티크리스천 공간에 들어가 있는 게 습관적인 일이었기 때문에(그만큼 반기독교 정서가 널리 퍼져 있다는 거라고 생각한다.)또 무슨 이야기를 하나 클릭해보았다. 글은 아니고 네이트 덧글을 캡쳐해서 올려놓은 게시물이었는데, 읽으면서 그냥 끄덕끄덕 했다. 나도 고3 전까지는 저러고 있었으니.

 공개글로 적을 것이기 때문에 혹시 이 글의 독자가 있다면, 위 문단을 읽고서 '어휴.. 결국 개독 종자군 쯧쯧'하는 판단이 섰을 것이다. 맞다. 나는 크리스천이다. 당신네들이 그렇게도 싫어하는 '예수 믿으세요'를 주변에 이야기하고, 뻥튀기 판타지라고 이야기하는 십자가 죽음과 부활에 대해 이야기한다.<- 이쯤 되면 벌써 창을 닫았거나, 신나게 욕할 마음으로 손가락을 풀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도 예전엔 열심히 비방하고, 안 믿던 사람이었다. 그러니 키보드로 신나게 공격하기 전에, 내 이야기를 먼저 들어보시라.

 

 '교회'라는 곳에 처음 나가기 시작한 건 초등학교 3학년 즈음의 일이다. 아무것도 모르고 부모님과 같이 나가기 시작했고, 교회라는 곳이 좋았기 때문에 중학교 2학년 때까지 거의 습관적으로 나갔다. 중2 하반기에 하나님에 대해 의문을 품기 시작했고, 고1때부터는 신앙심도 없이 한 달에 한 번 꼴로 '좋은 말씀' 들으러 나갔다. 고1 가을부터는 그마저도 하지 않게 되었다. 당시 나는 작가가 되고 싶어 남들보다 더 많은 지식을 접하려고 했고, 그래서 종교, 신화, 전설등에 대한 이야기는 물론 이에 대한 해석 및 연구자료도 많이 읽었다. 내게는 하나님이 그저 '인간이 의지할 것이 필요해서 만들어낸' 존재에 불과했다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과 부활은 '신화소'쯤으로 생각했다. 이미 이렇게 돌아서버린 상황에, 분쟁이나 다툼을 꺼리는 성격이 있어 '예수천국 불신지옥'이라 외치며 타종교에게 극단적인 태도도 무척 싫어했으니 내가 '안티 크리스천'이 된 건 당연한 수순일지도 모른다. 부모님은 내게 교회 나가기를 계속 권하셨지만 극구 반대했고, 주변에서 친구들이 한 번 나가보자고 권해도 핀잔을 주며 거절했다. 인터넷이나 TV를 통해 자주 접하는 교회, 목회자들의 비리를 보며 '하나님은 그냥 신화'라는 생각이 더 견고해졌다.

 그러다 고등학교 2학년 때, 전교에서 '예수쟁이'로 유명한 아이와 같은 반이 되었다. 그 애는 첫날부터 정자세로 성경책을 읽고 있었다. 그 품새가 너무도 당당했다. '답 없는 종교쟁이'라고 생각하면서도 한편으론 그 애가 초등학교 때와는 전혀 다르게 성품이 변한 걸 보고 호기심이 생겨 말을 걸었다. "나도 몇 년 전에는 하나님을 믿었지만 지금은 없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너에 대한 얘기를 들어보니 장래희망이 선교사라고 하더라, 대체 네가 믿는 하나님이 있긴 하냐." 이렇게 묻자 대뜸 "그럼 기도해보자. 있나 없나는 기도해보면 알 거다."라고 해서, 그렇게 해볼 겸, 호기심의 대상이었던 '광신도'에 대해 탐구해볼 겸 해서 기도모임에 참석하기 시작했다.

 신앙심이 없어서 형식적으로 기도하고, 기도가 다 끝나고 이야기하는 데 주안점을 두었다. 이것저것 이야기하다보니 내가 하나님을 떠나게 된 결정적인 이유가 크리스천들에 대한 상처라는 걸 알게 되었다. 그래서 그 친구가 '건강한 공동체를 소개해주겠다'고 해서 라이즈업을 알려주었고, 제자훈련에 참석하기 전에 우선 집 근처에서 하는 정기집회에 참여했다. 흔한 찬양집회라고 생각했는데 시간이 갈수록 사람들이 '무아지경'으로 빠져들어서 솔직히 무서웠다. 무늬만 크리스천일 때 장로교 교회만 다녔기에 통성기도도 신기했는데 여기저기서 '방언'을 터뜨리니 '혹시 사이비는 아닌가..' 생각했다.

 광신적인 모습을 보고 질려서 기도모임도 드문드문 참석하고, 제자훈련 참석 권유를 거절하기도 여러 번. 크리스마스 저녁 때 예배 없이 조촐한 파티를 한다고 해서 따라갔다. 선물교환, 식사, 간단한 교제 등 따뜻한 분위기가 좋았다. 그러면서 '이런 사람들이 왜 예배때만 되면 그렇게 변하나..?'하는 의문을 품고, 고3 첫주부터 제자훈련에 나가기 시작했다. 지금 돌이켜보면 참 다행이었던 게, 당시 나를 맡은 분이 참 신실하고 따뜻한 분이었다. 그래서 크리스천들에게 받은 상처가 점차 아물기 시작했다. 그 위에 말씀이 심어지니 마음이 열리기 시작했는데, 한 가지 더 감사한 일이 있다. 지부장이신 조휘용 목사님 설교를 듣고 있으면 폭넓은 지식과 세상을 읽는 깊은 통찰력에 감탄하곤 했다. 게다가 조휘용목사님 본인이 하나님을 전혀 안 믿었던 분이니, 그분의 간증을 듣고 나서 '하나님이 있을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3월부터 부모님 몰래 교회에 나가기 시작했고, 공부도피수단인 줄 아셨던 부모님과 잦은 마찰이 있었다. 그래도 꾸준히 신앙생활을 했고, 수능 이후에도 지속했다. 그러나 하나님에 대한 확신의 뿌리가 옅은 상태여서 위태로운 시기였다. 때마침 전국 모든 지부가 모이는 사역자수련회가 열려, 참석했다. 둘째날, 저녁 예배 때 기도 중에 방언이 터지고, 압도적으로 내 속에 임재하시는 하나님을 체험했다. 그 뒤로 나는 '하나님은 살아계시다'는 사실에 확신을 가졌으며, 지금은 주변 혹은 노방전도하다 만나는 안티크리스천들에게 내 간증을 섞어 복음을 전하고, 그들이 가지는 의문에 대해 나름대로 설명을 해주고 있다.

 가끔 복음을 다 들은 뒤, 논쟁을 붙이는 사람들이 있다. 최선을 다하지만 이성이나 논리로 하나님을 설명해 안티크리스천들을 '설득'하기엔 내 지식이 짧다. 세계의 석학들도 명쾌히 해내지 못하는 일을 내가 어떻게 할 수 있을까. 다만 간증이 그들을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할 수 있는 통로라 생각한다.

 안티크리스천이었던 내가, 지금은 하나님을 떠나 살 수 없다고 고백하고, 그렇게 싫어하던 노방전도를 하고 있다는 것. 이 자체가 기적 아닐까.

 

 이 글을 여기까지 읽은 독자님이 하나님을 믿든 안 믿든, 가장 중요한 건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십니다.'이다. 그 사랑을 전하기 위해 크리스천들이 전도를 하는 것인데, 지나친 열심으로 공격적이 되고, 많은 오해를 사면서 본질이 퇴색된 것 같다고 생각한다.

 크리스천들이 자기네만 홀리하다고 하면서 더 싸가지 없고 못되게 사는 것에 대해서는, 안타깝다. 사실 나도 똑바로 살진 못한다. 그러기가 보통 쉬운 건 아니지 않은가. 그래서 매일매일 올바른 삶의 태도를 견지하고 행동으로 옮기려고 처절한 노력을 한다.

 

 친구들은 이렇게 변한 내 모습을 보고 '내가 보기엔 넌 그냥 종교에 홀린 것/빠진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끝까지 믿지 않는다. 안 믿는다는데 어쩌랴. 강요하지 않고, 그냥 가끔 이야기만 꺼내고 만다. 싫어하면 안 하고. 앞서 말했지만 내가 극단적 전도행위를 싫어했기 때문에. 내가 무슨 설을 풀어놔도 안티들 눈에는 다 '똑같은 종족'으로 보이겠지만, 한때 안티크리스천이었다는 점에서 당신들에게 조금 더 설득력 있을 수는 없을까?

 

 제아무리 과학적으로 완벽한 설명이 완성된다 하더라도 결국 마음이 열리지 않으면 끝까지 믿지 않는다.

 다만 나는 그 사람들에게 말해주고 싶다. '변절자'의 삶이 나에겐 더 축복되고 기쁘다고.

(아마 이 문장을 보고 끝까지 '쯧쯧.. 종교에 홀리면 사람이 망가진다니까.'라고 하겠지만.)

Posted by 비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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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사람들이 그리 아둥바둥 열심히 사는 이유는 안정감을 얻기 위함이다."
 아는 누나가 이렇게 입버릇처럼 말하곤 한다. 잠깐만 생각해도 바로 수긍할 수 있는 좋은 통찰이다.

#1-1
 청소년들이 집단 세뇌되어 향하고 있는 '성공'. 여러 의미가 있는데 가장 큰 것은 '돈 많이 벌고, 높은 사람이 되는 것'이다. 왜? 먹고 살 걱정 없게. 성공하고 싶은 이유치곤 시시해서 더 물어봤다.
-그게 뭐가 좋은데? 
"인생을 즐길 수 있고, 스트레스 안 받고,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고."
 이외엔 딱히 답하지 못했다.
-행복이 좋을까 성공이 좋을까? 
 그런 질문은 처음 듣는다는 듯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1-2
 오늘 나는 초저녁에 잠이 들어 새벽에 일어났다. 밖은 오싹할 정도로 고요하고, 번잡하던 도로엔 차도 거의 보이지 않았다. 불이 켜져 있는 집은 한 동에 두 가구 정도. 다들 잠들어 있었다. 시간대가 비슷한 수 억명의 사람들이 각자의 공간에서 죽은 듯 자고 있을 거라 생각하니 기분이 묘했다. 바로 어제, 오늘을 준비하며 잠들었겠지.
 해가 뜨고 날이 서서히 밝아오면 거리에는 다시 사람이 가득 차고, 도로는 막히고, 소음은 미친 듯이 도시를 휘감을 것이다. 보이지 않는 경쟁이 사방에 널려 있고, 하나하나 뛰어넘어야 할 역경들이 도사리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왜? 심지어 가질대로 다 가져서 여생을 즐기며 살 수 있는 사람들마저 무한경쟁의 틈바구니에서 이 악물고 살아간다.

#1-3
 아둥바둥 열심히 살아도 '사고'는 불시에 온다. 가벼운 것이라면 회복될 수 있지만, 심각한 사건은 회복될 수 없다. 하루아침에 주식이 휴짓조각이 될 수도 있고, 교통사고를 당해 장애를 가질 수도 있으며, 사랑하던 사람이 갑자기 곁을 떠나버릴 수도 있다. 손에 쥐고 있는 것? 내일이면 없어질지도 모른다. 어찌 보면 우리네 삶이란 '사고'를 막기 위해 발버둥 치는 처절한 몸부림인 것 같다.

#1-4
 집 근처 길은 별 장애물 없이 뻥 뚫려 있다. 길도 잘 닦여 있어서 제대로 걷는다면 넘어질 위험도 없다.  집으로 들어가기 위해 지나가야 하기 때문에, 얼마나 걸으면 입구에 도착하는지도 감으로 알고 있다.
 어느 날은, 집에 가다가 피곤해서 눈을 감고 그 길을 걸었다. 내가 어디서부터 시작했는지를 확인하고, 한 발 한 발 또박또박 내딛었다. 그런데 앞에 뭐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아무것도 없음을 몇 초 전에 확인했는데도, 엄두가 나지 않았다. 결국 살며시 눈을 떴다.
 그리고 앞에는, 밑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아무것도 없다는 걸 생각하며 걸으면 됐다.

#1-5
 나는 예전에, 늘 불안함 속에 살았다. 집이 끼니 걱정할 정도로 가난하지도 않고, 공부를 아주 못하는 것도 아니었는데 끊임없이 걱정했다. 이것저것 사소한 것에도 스트레스를 너무 많이 받아 늘 어깨가 뭉치고 아팠다.
 하지만 지금은 이전에 비해 많이 나아졌다. 내 속에 '믿음'이 생겼기 때문이다. 세상을 창조하신 좋은 분이 나를, 그리고 모든 사람을 사랑하시고 그분의 역사하심에 따라 역사가 흐른다는. 내 인생을 가장 좋은 길로 인도하시며, 그분 안에서 완성되리라는 믿음이 있다. 안정감. 나는 내 삶 가운데 안정감을 느낀다.
 아직 믿음이 약해 내 안의 불안함이 아주 없어진 것은 아니다. 때론 믿음 때문에 남들보다 더 힘들 때도 있다. 그러나 오직 신뢰함으로 나아가려고 노력한다. 처음부터 완성된 것은 없으니까. 성장하기 위해선 시간과 양분이 필요하다. 매우 느리지만 조금씩이라도 성장한다면, 어느 순간 일정 단계를 넘고, 넘고, 넘고.. 그래서 온전한 믿음에 가까워질 것이라 확신한다.
 그리고 믿음을 그저 내 마음의 위안쯤으로 갖는 게 아니라, 모든 사람이 본능적으로 추구하는 '올바른 가치'가 세워지는 데 가장 강한 원동력으로 작용할 수 있도록 노력할 생각이다.

 내가 믿고 의지하는 이 분은, 하나님이다.
Posted by 비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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