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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유행가를 잘 안 듣는다. 마음에 드는 것 하나만 집중적으로 파는 매니악한 성격이 가장 큰 이유고(음악의 경우, 가수별로 노래를 듣곤 한다.), 또 철이 지나면 쉽게 잊히는 특징 때문이다. 물론, 옥석은 쭉 기억된다. 우리가 '명곡', '애창곡'이라 하는 것들도 세상에 나와선 '신곡'이었으며 유행가 시절이 있었으니까. 그러나 대다수는 시간에 쓸리고, 새 것에 파묻혀버린다. 재작년 이맘때의 유행가 목록을 가져와서 살펴봤을 때 우리가 제대로 기억하고 있는 게 얼마나 될까? 음악이 지나치게 소비적인 느낌이 되는 것도 싫어하기 때문에, 유행가는 꺼리는 편이다.
 그렇지만, 아주 안 듣는 건 아니다.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다. 우선, 사람 많은 길거리를 지나다보면 자주 듣게 된다. 손님을 끌기 위해 온갖 매장에서 크게 틀어놓기 때문에. 공공장소에서는, 매너모드가 아닌 핸드폰 벨소리에서 짤막하게 듣게 된다. TV에서도 계속 나오고, 인터넷에서도 자주 볼 수 있다. 결정적으로, 나와 다르게 유행에 민감한 동생이, 많이 듣는다. 그래서 좋든 싫든 듣게 되어 있다.
 오늘 유독 버스커 버스커의 '정류장'을 흥얼거렸다. 노래가 "해질 무렵 바람도 몹시 불던 날"이라는 가사로 시작되어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선명한 노을 이미지가 떠올랐다. 그리고 은근히 매력적인 드럼 박자가 계속 맴돌았다. 이어폰을 꽂고, 가사창을 띄우고 어떤 내용인지 제대로 인식하며 감상했다.
 총 3분 20초 정도. 그런데 같은 재생시간을 가진 다른 곡들보다 훨씬 짧다는 인상을 받았다. 내용에 몰입했기 때문일까? 무척 마음에 들었다. ...

 "바람 쌩쌩 부는 날, 해질 무렵. 냉혹한 세상에 상처 받은 청년이 마음이 만신창이가 되어 집으로 돌아갑니다. 자괴감으로 가득 차서 파괴되기 일보직전입니다. 그런데, 사랑하는 여자가 '발을 동동 구르며' 자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가 사준 옷을 입고서요. 청년은 그녀의 품에 안겨 조용히 웁니다. 마음 속으로는 '그대라서 고마워요'라는 말을 하며." ...

 우리 청춘들은 중고등학생 때는 '좋은 대학' 하나만을 바라보고 살았다. 꿈을 꿔도 좋은 대학 가기를, 돈 많이 벌기를 꿈꾸도록 유도되었다. 많은 선생님들이 그렇게 지도한다.
 "자. 얘들아. 꿈을 꾸는 건 좋지만 현실이 녹록치 않단다. 나중에 뭐 해먹고 살래? 하고 싶은 건 대학 가서 하렴. 좋은 대학에 왜 가야 하느냐면, 성공할 확률이 높아지니까. 혹은 너네 연봉이 올라가니까. 좋은 직장 얻어서 예쁜/멋진 배우자랑 결혼할 수 있단다. 그리고 잘 먹고 잘 살 수 있게 되지. 즐기는 것도 그때 가서 해. 그럼 행복...할거다. 아마."
 대학에 와서는 학점, 토익, 기타 스펙에 시달린다. 스펙을 쌓고 쌓아도 취업이 안 된다. '스펙푸어'라는 단어까지 나왔다. 갖출 스펙을 다 갖췄는데도 취직이 안 되는 사람을 일컫는. 이런 냉혹한 현실 속에 그나마 위안이 될 수 있는 건, 사랑하는 사람들의 온정이다. '정류장' 속에는 의도하든 의도하지 않았든 이런 공감의 요소가 녹아있다.
 한편, 2011년, 김난도 교수의 '아프니까 청춘이다'라는 책이 수 십 주에 걸쳐 베스트셀러 1위를 했다. 이 현상에 대해 전문가들(대체 어떤 분야인지는 기억이 안 나는데..)은 "2,30대 청춘들이 그만큼 위로를 바라는 것"으로 간단히 요약할 수 있는 장황한 분석을 내놓았었다.
 김난도 교수가 그 책에서 어떤 말을 어떻게 담아냈는지 모르지만, 나는 노래 '정류장'이 책 '아프니까 청춘이다'보다 더 파급력 있다고 생각했다.
  우선 노출량의 차이다. 우리나라 성인의 한 달 평균 독서량이 0.8권이라는 점과, 책 한 권을 다 읽는 데 드는 시간을 생각해보자. 길을 걷다보면 흘러 나오는 3분짜리 유행가보다는 훨씬 더 가능성이 적다.
 비용 문제도 있다. 책값은 14,000원(정가). 3000원짜리 편의점 도시락이 4개 하고 조금 남는다. 한 끼 식사값도 전전긍긍하는 우리네 청춘들이 과연 거금을 들일지? 차라리 도서관이라도 있으면 다행이다. 우리나라의 도서관 보급률은 형편없다. 다소 오래된 자료이긴 하지만, 2003년 OECD 통계에 따르면 우리나라 국민 1인당 장서 수는 핀란드(7.2권)의 1/10 수준(0.82권)이고 일본(2.53권)의 1/3에 못 미친다. 반면 도서관 한 곳 당 인구수는 OECD 평균(인구 5만 명 당 도서관 1관)의 두 배이다.
 결정적으로, 사람은 이성적이기보다 감성적인 존재이며, 사랑에 목말라 있다. 연애를 한 번도 해보지 못한 사람도 멜로 영화에 나타나는 사랑 이야기를 보고 기뻐하거나 눈물을 흘린다. '정류장' 속에는 사랑 이야기가 녹아있다. 띡히 뭐라고 묘사하진 않았지만, 노래를 듣는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이 느낌이 무엇인지 안다. 어렴풋라도 말이다.
 또 언어는 우리가 느끼는 것의 80%밖에 온전히 표현하지 못한다는 것을 감안하면 차이는 더 확실해진다. 이성을 바탕으로 언어로 서술된 책보다, 감성을 바탕으로 느낌으로 받아들이는 음악이 훨씬 더 폭발력 있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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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렇게 거대하게 분석해놨지만, 본질적으로는 단순하다. '들으니 느낌이 좋다.'
ㅋㅋㅋ

Posted by 비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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