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에 자기계발 서적을 즐겨 읽었다. 새로운 사실을 알고, 좀 더 나은 나로 변화시키는 게 좋았다. 그런데 문득, 건조해지기 시작했다. 다 맞는 말인데. 좋은 이야긴데. 이런저런 이론 말고 '사람 사는 이야기'가 그리웠다. 왜 있잖은가. 한동안만이라도, 잠시라도 간직하고 곱씹을 수 있는 그런 이야기. 말랑말랑한 멜로도 괜찮고, 기괴한 이야기도 괜찮고, 어쨌든 사람과 사람이 만나 서사가 되는 그런 이야기.
이야기에 허기를 느낀 건 자정이 가까운 시각이었다. 사놓고 읽지 않은 소설책들에는 손이 가지 않았다. 전자책 도서관에 접속했다. 그런데 서점 가서 소설분야를 둘러본지도 오래되어, 요즘 무슨 작가가, 작품이 좋은지 선별할 수 있는 능력도 사라졌다. 그래서 그냥 분야별로 보기를 눌렀다. 이 책, 저 책,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그러다가 이 책 <중앙역>에 눈길이 갔다.
'아이고. 또 여자 하나에 미치는 한 남자의 이야기겠네.' 첫인상. 그런데 노숙이라는 소재가 정말 흥미롭게 느껴졌다. 이 흥미는 차차하더라도, 책을 더 고르기 귀찮은 데다가 첫 장편인 신예작가라는 데 흥미를 느껴 읽기 시작했다. 소설 배경이 되는 '중앙역'은, 내 생활권에서 가장 큰 어떤 역을 떠올리면서.
(다 읽고 난 감상을 뭐라고 표현해야 할까. 소설을 안 읽었더니 이제 알맞은 표현 찾기도 어려워진 모양이다.)
ㅡ말랑말랑하고 뜬구름 같은 로맨스도 없다. 고난 끝에 결국 성공한다, 사랑을 이룬다 이런 성공신화도 없다. '그리고 그들은 행복하게 잘 살았답니다' 식의 동화도 없다. 주인공이 남들과는 좀 다른 존재로 묘사되지도 않는다. 되려 평범해지다못해 비굴해져 삶의 굴레에 속하는 모습이 참 현실적으로 잘 나타나 있다.
"나는 저 사람들과 다르다. 나는 이곳을 떠날 수 있다. 스스로에게 얼마간의 유예 기간을 주기도 한다. 하루가 지나면 또 하루만큼 늘어가는 유예 기간 따위가 아무 소용없다는 걸 알면서도 그렇게 한다."
-12%(전자책이라 쪽 수가 없다.)
"누가 돈을 주기만 한다면 나는 이곳에서 죽는 시늉도 할 수 있을 것 같다. 네 발로 기고 바닥에 떨어진 음식도 핥아 먹을 수 있을 것 같다. ... 사람들에게 혐오감을 주지 않도록 해야 한다. 나는 정말 그렇게 한다."
-85%
무슨 연유에선지 노숙생활을 선택한 남자. 그리고 그에게 다가온 한 여자. '살결'을 섞고, 남자는 여자를 갈망하기 시작하고. 남자는 끊임없이 묻는다. 날 좋아하느냐, 날 사랑하느냐. 여자도 가끔 묻는다. 날 좋아하냐, 사랑하느냐. 둘은 자주 몸을 섞는다. 마치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듯. 남자는 사랑한다고 생각해서 그녀를 위해 희망을 가지고 열심히 일해보기도 한다. 하지만 결국, 사랑하느냐는 물음에 둘 다 확실히 답하지 못한다. 확신에 차서 답했다가도 이윽고 흐려진다. 뭐가 뭔지 스스로도 모르기 때문이다.
"너한테도 과거가 있잖아. 우리도 언젠가 과거가 돼. 그렇게 되어버려. 제발 이렇게 시간 낭비하지 말자."
-38%
"잘 들어. 나는 어떻게든 여기서 널 벗어나게 해 주려..."
"벗어나고 싶지 않아요. 그러고 싶지 않다고!"
-83%
대화에서도 잘 드러나있지만, 과거는 있으나 있는 게 아니다. 자기 과거도, 여자의 과거도 모른다. 미래를 말하며 길바닥에서 벗어나게 도와주려는 사람의 호의도 필요없다. 다만 남루하게 늘어진, 그래서 '그냥 살아야' 하는 현재만이 있을 뿐이다. 구걸로, 일용직으로 하루 벌어서 그 돈으로 술 파티를 벌이고, 서로 몸을 섞고.
-91%
위의 독백은 마지막에 나오는 장면으로, 결연한 의지가 느껴지기까지 한다. 과거나 미래 같이 뜬구름이 아니라, 명백한 현실인식을 통해 일어서리라는 비장한 의지도 느껴진다. 하지만 나는 왜 이 작품에서 내내 씁쓸함을 느꼈을까. 아직 가슴이 팔딱거리며 뛰는 새파란 20대라서? 아직은 현실보다 꿈 꿀 게 많은 젊음이라서?
<중앙역>을 읽는 내내 우리 세대를 생각했다. 청소년, 청년세대를. 내가 누구인지, 뭘 하고 싶고 뭘 좋아하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다만 대학 가는 게 중요하고, 성적과 학점, 그러다가 또 취업, 승진, 돈 많이 벌기, 성공.. '다들 그렇게 살잖아. 어쩔 수 없어.' 자기 자신이 누군지도 모르고, 설령 알았다 해도 잊어버린 채 하루살이로 그냥 '사는대로 사는' 삶. 어떻게든 여기서 벗어나게 해주겠다는 그 말에 대해서도 '놔둬요! 그냥 죽어버리게!'나 다름 없는 외침으로 응수한다. 사랑인지 아닌지 헷갈리지만 어쨌든 몸이 반응하니까 서로 사랑한다고 믿는다. 그런데 사실은 공허해서, 불안해서, 항상 사랑하냐고 되묻고. 결정적인 순간에는 '몰라요! 나 이 사람 모른다고요!'라며 내버리는.
사는대로 사는 삶.
새삼 내가 하고 있는 활동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게 된다. 삶과 죽음의 문제를 다루고, 영원함에 대해 이야기하고, 그래서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주어진 사명을 알고 실현해나가도록 하는, 생명구원에 대해서. 많은 분들의 도움과 또 은혜가 없었으면 나 또한 이런 삶을 살고 있었으리라는 생각을. 동시에, 마치 영화나 동물을 관람하듯 먼발치에서 관조하지 말아야 한다는 생각 또한 한다. 함께 호흡하며 부대끼자.
한 사람이라도 더 세우자. 한 사람이라도 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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