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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컴퓨터가 하도 삐걱거려서(하드웨어 문제+소프트웨어의 버벅거림), 중요 자료를 백업 드라이브에 모아놓고 포맷을 했다. 삼촌이 오셔서 Mt.Lion과 Win7을 선택해서 구동할 수 있는 기묘한 환경을 만들어놓고 가셨다. 덕분에(?)3개의 하드디스크 중 하나를 포기하게 됐지만.

 개운한 마음으로 포맷, 재설치를 하고 재부팅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으니_백업 드라이브가 없어졌다. 하도 황당해서 재부팅을 4번 씩이나 해봤는데, 여전히 자료가 없었다. 잘못 포맷한 건가? 재설치한 뒤라 시스템 복구를 쓸 수도 없고.. 길게는 6년 된 자료도 있어 허탈감을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다행히도 삼촌이 "디스크 하나를 바꿔갔다."고 증언해주셔서, 거기 있겠거니 하고 안심하고 있다. 백업 드라이브가 없으니 컴퓨터가 참 허전하다. 왜냐하면 거기엔 내가 평소에 듣는 음악부터 오래 전 쓴 토막글까지, 아주 사소한 것 하나하나 다 저장되어 있는 까닭이다. 습관적으로 즐기는 게임이나 즐겨찾기까지.

 

 '블로그가 있어 참 다행이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잘못 포맷한 줄 알고 허탈해 할 때, 가장 먼저 떠오른 게 '그간 내가 썼던 모든 글이 날아가다니!'였다. 한때 작가를 꿈꾸며 열심히 적었던 쑥스러운 졸작들과, 토막글들, 미완의 글들... 그게 그냥 날아갔다는 생각에 아무 의욕도 없었다. 그러나 다음 순간, 블로그에 썼던 글은 오롯이 남아있으리란 생각에 조금이나마 위로가 되었다.

 문학소년의 패기가 꺾인지는 몇 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글쓰기는 내 삶의 활력소이다. 즐거움이다. 행복한 고민이다. 그렇기에 아무리 사소하고 하찮은 글이라도, 한 편 한 편이 소중하다. 하드디스크 데이터 손실사고로부터 안전할 수 있는 요런 공간, 블로그가 있어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앞으로는 블로그에 글쓰는 비중을 더 늘려야겠다. 공개글은 여전히 꺼려지지만 말이다.

Posted by 비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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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방금, 얼마 전에 새로 산 책을 다 읽었다. 좋아하는 작가의, 관록이 묻어나는 책이라 그런지, 두께에 비해 단숨에 읽은 느낌이다. 출판정보 쪽까지 다 읽고 탁 덮은 뒤, 책장에 비집어 넣었다. 그러면서 서가를 눈으로 훑어봤다. 요새 청소년이고 성인이고 책을 안 읽는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독서 애호가는 수없이 많다. 양질의 독서를 하는 고수들도 주변에 널려 있다. 그런 사람들에 비하면 나는 아직 걸음마 수준이라 할 수 있겠다. 들은 것은 많은데, 심도 있게 훑으면 말문이 막혀버린다. 그렇다고 해서 건성으로 읽는 것도 아닌데. 다만 직접 읽어보지 못한 고전이나 유명한 책이 많을 뿐이다(말은 항상 청산유수. 그나저나, 도서관이나 얼른 찾아봐야 할 텐데.)

 책장에 얌전히 혹은 어지럽게 배열된 책무리를 다시 훑었다. 대부분은 읽었지만, 사놓고 읽지도 않은 책도 조금 보이고(!), 읽다가 이런저런 핑계 대면서 다 못마친 책, 중도에 던져버린 책, 두번세번 읽고도 아직도 난해한 책, 지금 다시 읽어도 정말 재밌는/좋은 책 등등 그 종류도 무척이나 다양하다. 책장을 조심스레 닫자 그네들은 유리장 너머에서 자기 위치를 지켰다. 영화를 보려고 컴퓨터를 켰는데, 문득 무슨 말인가 쓰고 싶어 또 '등산일지'를 적는다.

 

 나는 책은 그럭저럭 읽는다. 많이 읽지도, 그렇다고 적게 읽지도 않는다는 뜻이다. 그런데 내용을 잘 기억하지 못하는 편이다. 관심이 없는 것도 아니다. 읽을 땐 집중해서 열심히 읽는데, 시간이 지나고 누군가 내용을 물어보면 대개 '잘 모른다'라고 답할 수 밖에 없다. 심지어 방금 읽고 덮은 책도(좀 추상적인 내용이긴 했으나)요약해서 말해달라 하면 조금 막힌다. 독서코칭이라도 받아야 하나?

 세 번을 읽었는데도 머릿속에 아무것도 남지 않아있는 사회과학 서적, 한 번 읽고서 긴 이야기를 할 수 있게 된 작품, 볼때마다 새로운 작품.. 천차만별이다. 특히 거듭해서 읽어도 아무 기억에 남지 않는다는 건 참 충격이 아닐 수 없다. 

 난 책을 읽을 당시엔 주로 주인공의 감정에 집중하고 이입해서 본다. 그리고 남는 것 또한 감정의 흐름이다. 내용을 뚜렷이 기억하는 책을 되짚어보면, '감정'이 스토리라인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 작품들이다. 이걸 강점으로 활용할 수는 없을지?

 

 우와. 이 글은..글이 아니다. 그냥 독백이다. 내가 무슨 이야길 하고 싶은 건지 모르겠다. 그래, 혼란스러운 정신상태를 충실하게 반영하고 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나. 두서없는 독백은 이 정도로 접어두고, 일단 근처의 도서관부터 찾아보자. 아직 읽고 싶은 책이 많다.

Posted by 비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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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Fiction임을 알려드립니다.)

참조사진: http://thehobbit.tistory.com/199


 "식약청 조사 결과 대부분의 제약회사들이 TV나 신문 등에 과대.과장광고를 하고 있는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주로 성분을 늘리거나 줄이는 수법을 써서 소비자들을 속여왔습니다."

 TV에서 또 달갑지 않은 뉴스가 흘러나왔다. 어제 회식자리의 후유증을 해소하기 위해, 광고를 보고 소화제를 하나 사먹었기 때문이다. 차라리 몰랐으면 속 편했을걸. 괜히 틀어놨다. 그래도 끄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끄면 공허하다. 자취생활 시작하면서부터 혼자인 시간이 압도적으로 많아졌다. 그때문에 자주 외로워지고, 사람이 그립다. 처음 한 주는 내 시간, 내 공간이 주어졌다는 사실에 기뻐했으나, 이젠 처절하게 혼자라는 사실이 심술궂게 속을 뒤집어놓는다.

 

 "'왕따'가 직장 내에서도 심각한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전문설문조사업체와 본 방송국이 직장에 다니는 성인남녀 0000명을 대상으로 설문을 실시한 결과...."

 

 뉴스. NEWS. North East West South. 사방의 소식을 전하는 매체. 혼자 사는 세상이 아니기 때문에, 그리고 나는 지금 혼자이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의 삶은 어떤지, 그리고 함께 살아가야 하는 이 세계는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알 필요가 있다. 하지만 나는 뉴스를 좋아하지 않는다. 통신매체의 발달로 사방의 소식은 물론 지구 반대편 소식까지 생생하게 전해주는 뉴스 본연의 목적에는 참 충실해졌으나, 가여워라. 세상은 암덩어리인 모양이다. TV나 신문 등 각종 뉴스는 온통 악으로 가득 차 있다. 설령 좋은 소식이 박터진다 한들, 일주일도 못 가 다시 시커먼 이야기로 뒤덮여버린다. 좋은 소식은 무슨 미니시리즈마냥 조그맣게, 나쁜 소식들이 미처 채우지 못한 한귀퉁이를 차지하고 있다. 아마 판도라의 상자에서 빠져나가지 않았(정확히는 '못했')던 '희망'의 면적만큼이 아닐까?

 그렇지만 단순히 TV를 틀고 있을 때 고정시켜놓으면 좋은 채널은 뉴스가 제일이다. 코미디는 시끄럽고, 다큐는 지루하며, 대개의 프로그램은 방청객 때문에 요란하다. 뉴스는, 아나운서가 절도있게 또박또박 말을 하고, 기자도 말을 절제해서 하기 때문에 훨씬 깔끔한 느낌이 난다.

 

 "우리나라가 12년 연속 OECD국가 중 자살률 1위라는 불명예를 얻었습니다. 작년에 비해 항우울제 처방은 약 00% 증가했으며.. 전문가들은.."

 

 소화제를 먹으니 좀 낫다만, 아직도 머리가 아프다. 회식하며 단합해야 한다고 연거푸 술잔을 주는 걸 거절하지도 못하고, '20대의 패기' 운운하면서 다 받았던 게 화근이다. 아직 젊어서 망정이지 좀 더 나이 들었으면 아마 이만큼도 회복하지 못했겠지. 우리 팀 사람들은 거의 다 주당인 것 같았다. 그래서 앞으로가 더 걱정이다. 마시다보면 는다고는 하는데, 그들은 마시면서 배운 게 아니라 술을 먹기 위해 태어난 족속 같았다.

 

 "70대 독거노인이 숨진지 일주일 만에 발견되었습니다. 그동안 이웃에 사는 어느 누구도 이 사실을 몰랐다고 합니다. 기자 연결해서 자세한 사항 알아보겠습니다."

 

 물을 벌컥벌컥 마시다가, 문득 탁자 위에 놓인 신문지에 눈길이 갔다. 한 주간 베스트셀러 목록이었는데, 1위로 '아프니까 청춘이다'가 몇 십주째 자기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이어서 '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이 그 뒤를 바짝 쫓고 있었고, 순위표 옆에는 '스펙푸어'라는 단어가 큼지막하게 제목으로 박힌 기사가 활자를 펼쳐놓고 있었다. 이젠 별의별 신조어가 다 나온다.

 

 "요즘 면접은 예전과 많이 달라졌습니다. 특별하게 보이기 위해 이색적인 아이디어들이 샘솟는 신입사원 면접 현장을, 기자가 밀착취재해봤습니다."

 

 시선을 내리자 원기회복을 돕는다는 약에 대한 신문광고가 실려 있었다. 신입공채와 회식자리가 많을 이맘때를 겨냥해서 그런지, 사진 속에는 잘 차려입은 직장인 남녀 여럿이 거의 비슷한 자세로 환하게 웃으며 '화이팅!'이란 동작을 취하고 있었다. 그리고 바로 그 위엔 '화이팅 대한민국'이라는 큼지막한 글자가 알알이 박혀 있었다. 눈의 초점을 살포시 내리자 [용기.포장]과, 부작용에 대한 경고문구가 길게 적혀 있었다: "부작용이 있을 수 있으니 첨부된 '사용상의 주의사항'을 잘 읽고, 의사.약사와 상의하십시오."

 

 "..소심하고 앞에 잘 나서지 못하는 성격이지만, 이를 극복하기 위해 피나는 노력을 하고 면접에 임했고, 면접관 분들도 그런 제 노력을 높게 사신 것 같습니다."

 

 그 순간, 기묘한 생각이 들었다. '용기'가 容器(Container)가 아니라 勇氣(Brave)로 인식된 것이다. 그리고 시선을 내리깔은 탓에, 광고사진 속에서 환하게 웃고 있는 사람들의 얼굴이 코 위로는 보이지 않게 되었다. 그렇게 인식되자 '이 웃음은 몇 %가 진짜일까?'라는 의문이 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미친 사람처럼 껄껄 웃었다. 동시에 겉잡을 수 없이 슬퍼졌다.

 勇氣로 포장한 채 사회로의 첫발을 내딛은 나, 혹은 20대들. 빚더미 속에서 대학을 마치고, 아우성 속에 취업에 성공하면 기성세대는 물론 같은 세대끼리의 치열한 경쟁이 우리 숨통을 죄고 있다. 그리고 나와 맞는 사람들만 있으면 좋으련만, 사회라는 게 꼭 그렇질 못하다. 안 맞는 사람과도 잘 어울릴 필요가 있다. 그러다보니 이따금 스트레스를 받고, 그런 척 안 그런 척. 종종 '포장'될 필요도 있는 것이다. 그 사이 마음은 점점 닳고 지치지만.

 가만. 마음이 맞는 동료라도 평소에 연락하고 지내는 사람은 몇이나 되던가? 동료들은 동료인 동시에, 승진을 염두에 두면 경쟁상대인 것이다. 처음엔 이렇게 생각하는 스스로가 참 싫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사고회로는 알아서 사회에 적응했다. 다른 사람들도 비슷하겠지. 사진 속에서 함께 화이팅을 외치는 저 사람들, 같은 회사에 같은 부서라면, 아마 속은 겉과 많이 다르지 않을까.

 

 "지난 6년 간 부녀자들을 공포에 떨게 했던 이른바 '발바리'가 붙잡혔습니다. 두 딸을 둔 가정의 평범한 가장으로 밝혀져 지역사회는 큰 충격에 휩싸였습니다."

 

 나는 용기로 포장된 삶에 지쳤다. "사용상 주의사항"이라도 있으면 좋으련만, 누가 그런 메뉴얼을 만들어주긴 하든가? 우후죽순 출판되어있는 '직장생활 끝장나게 잘하기'류의 책도 그저 참고일 뿐, 이정표 역할로서는 부족하다. 하긴, 의학의 결집체이자 증상에 따라 용도가 확실한 약품도, 사람에 따라서는 '의사 약사와 상의'해야 하는데. 사람 간의 일은 오죽할까.

 그래도 의사 약사는 동네 어딜 가나 있기나 하지, 용기로 포장된 '나'는 상의할 사람도 없다. 아하, 그래서 다들 책을 손에 잡고 위안을 얻으려 하는건가? 이 시대의 지성인들은 책을 통해 말을 건넨다. '아프니까 청춘이다'라면서. '빨리빨리'밖에 모르는 종족에게 '멈춰보세요. 그럼 다르게 보입니다.'라면서. 지속적으로 책이 팔리는 걸 보면, 우리네의 아픔을 잘 알고 제대로 어루만져주는 모양이다.

 

 "우리나라의 1인당 국민소득이 총..."

 

 TV의 전원을 꺼버렸다. 인근 도서관에 그 책들이 있으면 좋을 텐데. 십중팔구 대출 중일 거란 생각이 들었지만, 일단은 발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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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비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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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귀가조치로 군대에서 돌아온 뒤, 조용히 지내고 있다. 엄밀히 말하자면 '회복'도 겸하고 있다. 입대 전에 싹 다 정리하고 마음가짐도 다잡고 했는데, 돌아와버렸으니 허탈함이 여간 큰 게 아니었으니. 어쨌든 재신검+재입영 전까지는 복학도, 입대도 할 수 없기 때문에 '휴가' 혹은 '재도약' 기간으로 생각하고서, 서서히 생활을 잡아가는 중이다.

 생활의 기틀을 잡아가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하게 작용하고 있는 것은, 다름아닌 글쓰기이다. 스스로가 봐도 참 역설적이다. 입시 실패와 여러 사연으로 '글은 그저 취미수단'으로 생각하고 이전만큼 치열하게 쓰지도 않는데. 간혹 글쓰기를 지양하는 마음도 들곤 하는데(글을 위험하게 '휘둘렀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런데 회복의 기틀이다. 너털웃음이 나온다.

 그렇다면 어디서 글쓰기에 다시 자극을 받았던가, 되짚었다. 첫번째는 일기다. 입대 선물이라고 왕틴들이 돈을 모아 케이크와 일기장을 선물해주었다(선물은 동갑내기 친구가 고민고민하다가 기도하고 골랐다는데, 나도 모르게 내게 필요했던 것이었다. 할렐루야!). 가격을 떠나서, 굉장히 쓰고 싶게 생긴 일기장이다. 표지나, 속지나. 무게감도 적당하다. 게다가 이건 무슨 일이 있어도 집(혹은 그에 준하는)에서 쓰기로 정했기에, 독자를 최소한으로라도 의식하며 썼던 것과는 달리 정말 진솔하게 내면을 바라볼 수 있다.

 두번째는, 얼마 전 본 근대가무극 <윤동주, 달을 쏘다>의 영향이다. 극 전반에 걸쳐 시인으로서의 고뇌가 짙게 드러나있다. 자랑스럽게 내놓을 정도는 못 되지만, 소설을 써본 경험이 있어서 고뇌에 공감했었다. 당시 시대상까지 덧입히면, 아마 나와의 것과는 급이 달랐으리라. 또한, 모든 남자 주연들이 '시는 나에게 무엇인가'라는 가사가 들어간 곡을 부르는 장면이 몇 번 있는데 그게 깊게 뇌리에 남았다. 고등학교 시절 문학소년이었던지라, 그 자문에 대해 같이 가슴 뛰었던 기억이 난다. 연극은 8월 중순에 끝났지만, 여운은 아직까지도 남아있다.

 세번째는, 독서다. 요즘 김연수님 신작 <파도가 바다의 일이라면>을 읽고 있는데, 역량 있는 작가라 그런지(<세계의 끝 여자친구>를 꼭 읽어보시길!)순식간에 1/3을 읽었다. 그러면서 드는 충동 '나도 이런 읽을만한 이야기 하나 쓰고 싶다'. 꼭 김연수님이 아니라도 잘 쓴 이야기, 맛있게 읽을 수 있는 이야기를 접할 때마다 그런 충동이 든다. 아마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의 문청들이 공통적으로 겪는 증세 아닐까?

 

 여차저차한 이유가 나열되어 있지만, 근본적으로 '버릇'이 되어버렸기 때문이 아닐런지. 제버릇은 남 못 준다고, 중고등학교 4년간 치열하게 글 하나 바라보며 살았던 문청시절의 선연한 흔적이, 지금까지도 살아 숨쉬는 것이라 생각한다. 결국은 떼어놓질 못하는구나, 글쓰기를.

 글쓰기는 늘 어렵지만 또 좋고, 재밌기도 하다. 늘 첫대면 같다.

Posted by 비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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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Fiction입니다. 참조 이미지: http://thehobbit.tistory.com/166)

 

A에게

 이거 기억 나? 작년인가 찍었던 것 같은데. 사진 정리하다보니 이게 나오더라. 네가 가장 좋아하는 장소인 '아지트'에서 찍은 거야. 우리가 함께 한 2년 동안, 이 장소에 대한 추억이 제일 많았다는 생각이 들어. 남들이 모르는 내밀한 사연들도 여기 녹아있고.. 아마 학교를 졸업하고 나서도 이곳은 계속 기억나지 않을까 싶네. 상념에 잠겨 사진을 보고 있으려니까, 네게 편지를 보내고 싶어졌어. 아마 마지막으로 하는 긴 이야기일거라 생각해서. 네가 들어주었으면 하는 것과 인지해주었으면 하는 이야기가, 좀 있어.

 너의 '아지트'는 참 신비한 곳이야. 앞으로도 이런 장소는 찾기 힘들 거야. 학교에 분명히 존재하는 장소인데 여길 아는 사람은 매우 드물어. 입구라는 게 있긴 하지만 개구멍 같이 작아서 보이지도 않고. 그런데 역설적인 건, 후미진 데 있기 때문에 이 근처에선 이 곳만 보게 돼. 떠올려봐. 주변은 다 컴컴한데 우리가 앉았던 소파 쪽만 환하잖아. 너는 그게 매력이라고 했지. 2년 간 함께하면서, 너는 '형태'가 너무 강하다는 느낌을 쭉 받았어.

 무슨 이야기냐고? 그야. 이 곳의 형태가 너를 잘 반영하고 있는 것 같아서. 어두컴컴한 복도가 있고, 바닥에는 지하주차장 같이 일정 간격으로 흰 줄이 여럿 그어져 있고, 소파가 위치한 면에는 새하얀 자갈이 어지러이 깔려 있고.

 여기로 오는 입구는 분명 누구에게나 열려 있지만, 찾기가 쉽지 않지. 너도 그래. 다가가려 해도 좀처럼 들어가긴 힘들어. 간신히 들어왔더니 칠흑 같은 어둠이 몸을 감싸. 초반에 '잘못 다가간 게 아닌가'를 고민 많이 했어.

 빛을 찾아서 밝은 쪽으로 나오면, 소파에 네가 앉아있어. 그리고 고개만 빼꼼 내밀고선, 다가오려는 나를 물끄러미 바라봐. 너는 게임하듯이 1번 선, 2번 선, 3번 선으로 구분을 두는데, 네 마음대로 몇 번 선에 머무르게 할지를 정해.

 그리고 모든 단계를 통과하고 난 뒤엔 이 지면에 올 자격이 주어졌어. 문제는 여기가 하얀 자갈밭이라는 거야. 하얀 자갈들은, 겉으로 보기엔 엄청 예쁘고 좋아보이지만 실제론 뾰족뾰족해서, 네가 자갈을 치워 길을 열어주지 않으면 갈 수 없었어. 헛디뎌 넘어지기라도 하면 심하게 다치고 말이야.

 이것마저도 통과한 뒤엔, 드디어 '소파'에 앉을 기회가 주어졌어. 그래서 함께 공간을 나누고, 즐길 수 있었지. '소파'에 도달했다는 생각에 기쁘고 감사했어. 정말 힘들었거든. 말도 못하게 아프고 괴로웠거든. 너를 워낙 좋아해서 이에 대해 자부심도 느꼈고.

 하지만 최근에서야 깨달았어. '소파'에는 너밖에 올 수 없어. 내가 '소파'라고 생각하고 다가갔던 네 마음 속은, 실은 '왕좌'였던 거야. 너만의 왕좌. 네가 나눠줄 자리는 없어. 그렇지?

 나는 아직도 네 곁이 그립고, 그것 때문에 많이 힘들어. 하지만 왕좌에 머무르려 하면 서로에게 더 깊은 상처를 줄 것 같아서, 헤어지기로 한 거야. 어쩌면.. 너는 실낱 같은 상처조차 받지 않았을지도.

 '우린 하나'라고 생각하고 기뻐할 땐 좋았는데. 지금 보니 결국 타인이구나. 네 마음을 알 수가 없으니.

 

 너의 왕좌에서 내려와.

 2년 씩이나 교제했으면서도 나는 내게 어떤 상처가 있고 어떤 슬픔을 간직하고 있는지 몰라. 네가 거기 갇혀서 이야기하기를 거부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해. 너는 착각하고 있어. 거기 앉아서 아무도 오지 못하게 막는다고 해도 결국 상처입게 될 거야. 스스로가 내는 상처에 더 아프게 될 거야.

 

 우리 모두는 상처입고, 불완전하기 때문에 살아가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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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비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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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회사에서 사무보조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는 요즘. 직장생활이 어떤 건지 어깨너머로, 눈대중으로, 육감으로 많이 배우고 있다. 내가 맡은 업무는 '필요한 일'이긴 한데 '굉장히 민감한' 것이다. 나는 일개 아르바이트생이기 때문에 성실히 할 일 하고, 보고 잘 하고, 일처리 잘 하면 된다. 책임자는 따로 있기 때문에 대개 분쟁은 상인들과 윗선 사이에서 일어난다.

 한편, 그렇다고해서 책임이 아예 없거나, 회피만 하는 것은 아니다. 나도 생각이 있고 마음이 있기 때문이다. 중간에서 신중히 융통성을 발휘하거나, 분노가 분쟁으로 이어질 소지를 미리 잠재우곤 한다(이 문장을 적는데 몇몇의 얼굴이 스쳐지나간다. 에휴. 잘 풀려서 다행/아직도 꿍해서 피곤. 그 둘 중의 하나다.).

 

 오늘, 사무실에 이례적인 일이 있었다. 내 자리는 사무실 제일 안쪽이라 다른 부서에 비하면 조용한 편인데(소리가 잘 울리는 구조이긴 해도 말이다.), 입구에 있는 민원실에서 누군가가 분노했다. 여기까지 고래고래 큰 고함소리가 들릴 정도로. 지난번엔 스무 명 정도가 단장실까지 침투하려 했다는데 그땐 자리에 없었다. 그래서 이런 돌발상황은 처음 겪는 일이었다. 학창시절의 영향으로, 분노에 찬 고함소리를 들으면 가슴이 벌렁거리기 때문에, 몹시 불안해졌다(겉으론 무표정하게 자리에서 일을 하고 있었으니 아무도 모르셨겠지만.). 부서 직원들도 술렁였다.

 몇 번 더 고성이 들리더니 점점 소리가 가까워졌다. 분노를 사그러뜨리려 노력하는 어느 중년 남자가 보였다. 그는 부서 직원 중 한 명의 팔짱을 (억지로)끼고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그는 내가 하는 일을 담당하는 차장님 이름을 불러대며 금방이라도 싸울 기세로 으르렁거렸다.

 많이 차분해진 상태로 대화가 시작되었지만, 고성은 여전했다. 만일 조사업무 때문에 올라온 거라면, 실제로 돌아다니는 나까지 엮여 더 큰 문제가 될 수도 있겠다고 판단했다. 바로 자리를 떴다. 그리고 옥상에 올라가 가볍게 산책을 하고, 시간을 보냈다.

 

 맑은 하늘을 보다가 그 중년 남자의 일그러진 얼굴이 떠올랐다. 아니, 그뿐만이 아니라 여러 사람들의 얼굴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싸우는 사람들의 얼굴이. 그르렁, 으르렁, 캬악... 다들 이상한 괴성을 내고 있었다. 아마 내가 기억하는 그들의 언어가 혼잡해져서 그렇게 되었으리라. 기괴하고 이상한 광경이었다.

 그런데 일순간 그 모든 얼굴이 흐물흐물 녹아내렸다. 그리고 여러 광경이 펼쳐졌다. 아마도 자식들일 아이들과 함께 함박웃음을 지으며 끌어안고 있는 모습. 아마도 아내일 여자와 둘이 끌어안고 행복해하는 모습. 아마도 남편일 남자와 함께 TV를 보며 하하 웃는 모습.

 

 "애틋함"

 내가 그 순간 느낀 감정이었다.

 

 결국은 다들 안정되고, 사랑받기 위해 이를 악물고 하루를 살아간다. '너 죽고 나 죽자'는 식으로 차장님을 찾아온 중년남자도 집에 가면 아내와 자식들이 있을 것이다. 차장님에게도 아내와 아이들이 있다. 나도 집에 들어가면 한 가정의 장남이며, 내가 상대하는 상인들은 집안의 가장이다. 모두 소중한 사람들이고, 행복해지기 위해 발버둥치고 있는 것이다. 서로 사실을 조금만 인지해준다면, 너무 각박하게 돌아가지는 않을 텐데. 무한경쟁사회에서 먹고 살기 위해선 어쩔 수 없는 것일까?

 

 오늘도 하루가 저물어간다.

Posted by 비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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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내용은 Fiction임을 알려드립니다. 참조사진: http://thehobbit.tistory.com/152)

 

 아아, 어지럽다. 아무래도 너무 많이 마셨나보다. 내가 지금 어떤 상태인지, 그리고 이렇게 생각을 전개할 수 있는 걸 보면 멀쩡한 거 같은데. 시야는 격하게 흔들리고, 머리는 지끈거리고 속은 메슥거린다. 그래서 알게 되었다. 너는 취했다. 아주 많이. 그런데도 용케 걸어가고 있는 스스로가 ...신기하다. '대견(Proud)'라는 단어를 쓰려다가, 지금 내 처지가 대견(大犬)처럼 느껴져서 '신기하다'는 말로 바꾸었다.

 심야. 깊은 밤. 밤 하면 어둠. 어둠하면 고요. 침묵. 공포. 공포는.. 어.. 제출기한이 내일인 서류들. 받아들고서 또 종잇장처럼 구겨질 부장님 얼굴. 얼굴하면 거울. 거울은 유리.. 잠깐. 이러다간 끝도 없겠다. 내가 무슨 생각을 하려 했더라? 맞아. 심야. 심야였지.

 심야는 깊은 밤. 밤 하면 어둠. 어둠하면 고요. 침묵인데, 도심에는 '심야'라는 개념이 없는 것 같다. 대낮보다 더 형형색색으로 황황한 거리. 밤이 오면 '어둠이 내려앉다'는 표현을 쓰는데, 도심에서는 '하늘이 검게 변하고 달이 떴다'로 표현하는 게 옳을 듯 싶다. 하늘색이 달라졌을 뿐, 여전히 클랙슨 소리가 가득하다. 차는 더욱 빨리 달린다. 더 많은 사람들이 무리지어 돌아다닌다. 이 시간쯤 되면 대견(大犬)스러운 사람들도 보인다. 나처럼. 아니, 사람이라는 호칭이 맞긴 맞는 건지...

 우측보행을 하고 싶어도 지그재그로 걸을 수 밖에 없었는데, 비틀대다가 반가운 구멍을 만난다. 지하도다. 계단이 평소보다 세 배는 많다. 왜? 정상적으로 보이질 않으니까. 내려간다. 횡단보도는 싫다. 교복 입은 학생들도 그냥 데려가려는 삐끼들은 더 싫다. 어슬렁거리다가 회사 사람을 만나는 건 생각하고 싶지도 않다.

 계단을 내려가는 내 다리가 세 개. 그 세 개의 다리가 세 개의 계단을 딛는다. 새로운 세개로의 도약. 무엇이 무엇이 똑같을까? 다리 세 짝이 똑같아요. 예? 다리가 세 개라구요? 네 그렇습니다. 장난 치지 마세요. 다리는 두 개에요. 사고를 당해서 절단했다해도, 아예 없거나 하나가 전부라구요. 무식하시긴. 이게 바로 최신기술, 3D입체영상입니다. (당신의 돈을)사랑합니다 고갱님, 입구에 비치된 안경을 착용해주세요.

 불현듯 내 개그에 웃음이 폭발에 낄낄거렸다. 이윽고 중심을 잃고 아래로 처박혔다. 둔탁한 소리가 몇 번 나더니, 차가운 돌바닥과 입맞춤을 하고 있었다. 어, 이건 너무한데. 좀 더 로맨틱한 분위기에서 해야 하는 거 아니야?

 입술을 떼고도 잠시. 흔들리던 시야가 정리되고, 통증이 지끈거림을 압도하면서 생각이 또렷해진다. 천장이 보인다. 아마도 청소를 한지 꽤 오래됐을, 거무튀튀한 지하도 천장. 옷은 이미 더러워졌다. 아예 대자로 뻗어버렸다.

 안녕. 이렇게 만나는 것도 오랜만이구나. '내 공간' 그 곳은 아니지만.

 

 나는 어렸을적부터 지하도를 무척 좋아했다. 집 근처에 거대한 지하도가 있었는데, 시간 나면 그곳에서 놀곤 했다. 각 구역마다 특징이 있었고, 특징에 따라 고유한 이름을 붙이고 머무르곤 했다. 예를 들면 여기는 넓으니까 '브로드웨이', 저기는 계단 하나가 금이 가 있으니까 '감기 걸린 계단', 거기는 비가 오면 양 옆으로 물이 흐르니까 '시냇물'...

 부모님 품을 떠나서는 처음으로, 세상에 대해 알려주는 교과서. 교과서 속 그림에는 횡단보도나 육교만 있었지, 지하도는 없었다. 그래서 '내 공간'을 더 특별하게 여겼다. 모든 것을 다 알고 계시는 선생님도, '내 공간'은 모르실 거라 생각했다. 그래서 묻지 않았다. 아니, 실은 혹시라도 알게 되는 게 두려웠다. 나는 '비밀'이란 단어를 알기도 전에 이미 비밀을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점점 자라면서 '친구'가 생기게 되었고, 정말 소중한 것을 함께 하고 싶은 친구가 있으면 지하도로 데려왔다. 그리고 곳곳을 구경시켜주었다. 친구들은 '내 공간'에 감탄했고, 나는 우쭐대며 신나게 떠들었다. 관광이 끝나고 나면 두셋이서 공기놀이를 하거나, 딱지치기를 하거나,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같은 놀이를 즐겼다.

 이따금 나타나는 '수상한 사람'들은 내게 신비한 존재였다. 대개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내 공간'에 들어왔다는 사실 자체가 신기했다. 그래서 다시 지상으로 올라갈 때까지 뒤에서 몰래 훔쳐보기도 하고, 길을 알려달라고 해서 다른 출구까지 바래다 준 적도 있다. 어쩌다, 무엇을 하기 위해 왔는지 궁금했지만 묻지 않았다. 내게 관심을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좀 더 머리가 커져서 '내 공간'이 어디에나 있을법한 <지하통로>라는 걸 알게 된 뒤에도, 지하도에 오기를 계속했다. 대개는 힘든 일이 있을 때 왔다. 성적이 떨어져 집에 들어가기 두려울 때, 친구와 싸워서 몸과 마음이 상했을 때, 다 때려치우고 그냥 어디론가 떠나고 싶을 때. 때. 때. 그런 힘든 순간에 이곳에 오면 나도 모르게 금세 편안해졌다. 어느 날은 벽에 기대 노상에서 잠든 적도 있었다.

 고등학교 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사귄 여자친구도 '내 공간'에 데려왔다. 처음엔 그저 지나가기 위한 통로로 생각하고 순순히 따라들어왔던 그녀는, 더 깊이 들어가자 불안한 기색을 보였다. 그래서 이곳이 어떤 의미를 지니는 곳인지, 왜 데려왔는지를 설명해주었는데도 여전히 불안해했다. 이를 가만히 보다가 깊은 모멸감을 느꼈다. 내가 자기에게 음험한 짓을 할 거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나에게 가장 소중한 장소를 그저 '나쁜 짓 할법한 장소'로 받아들였다는 게, 혐오스럽기까지 했다. 그 길로 바로 집에 데려다주고, 서서히 연락을 줄여가다가 헤어졌다. 지금 생각하면 과잉반응이었지만, 당시 선택에 대해 후회는 없다.

 그리고 군 입대 전, 그 곳은 인근 지하철 역사와 연결되면서 구조가 변했다. 공사가 끝난 뒤 딱 한 번, 혹시라도 무언가 남아있을까 싶어서 갔었다.  '감기 걸린 계단'도, '시냇물'도, 그 외 내가 애정어린 시간을 보냈던 장소가 모두 변해버렸다. 끈이 끊어진 헬륨풍선 같은 마음으로 뒤돌아나오던 그 순간. 회상하면 아직도 너털웃음밖에 나오지 않는다, 그렇게 '내 공간'을 잃었다.

 제대한 뒤 복학하고, 학교를 졸업하고,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적응하랴, 학점 따랴, 졸업논문쓰랴, 취직자리 알아보랴, 정신없이 달렸다. 그리고 한숨 돌리자마자 망가지기 시작했다. 알 수 없는 공허함이 나를 뒤덮었다. 분명히 남들 부럽지 않게 좋게 출발해서 자리 잡아가고 있는데, 왜 그럴까? 알지 못했다. 그래서 회사생활을 더 열심히 해보기도 하고, 취미에 몰두해보기도 하고, 술독에 빠지기도 했다. 그런데도 여전히 공허하고 힘들었다.

 술과 다리 세 개로 새로운 세계에 도착한 오늘, 비로소 알게 되었다. 채우려 하면 할수록,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점점 더 커지기만 하는 이 구멍이 무엇 때문에 생기는지를.

 

 돌아갈 곳이 없다는 건 참 슬픈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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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비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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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즘은 돌아다니는 업무 대신, 사무실에서 서류확인 업무를 보고 있다. 돌아다니는 일은, 몸을 쓰고, 가끔 사람을 상대해야 하는 일이라서 피곤한 일로 생각했다. 위안인 게 있었다면 할당량을 다 채우고 남는 시간은 자유롭게 쓸 수 있다는 점이다.

 그런데 하루종일 서류작업을 하다보니 생각이 바뀌었다. 서류작업이 더 피곤하다. 서류대조/입력을 계속 하는 것도 이런데, 문서를 만들고, 보내고, 처리하는 건 얼마나 피곤할까? 확실히 직업은 적성과 흥미를 좀 더 우선해서 선택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서류작업을 반복하면서 지치지 않기 위해, 그리고 '생각'을 하기 위해 음악을 듣곤 한다. 동생과 함께 쓰던 멜론 아이디가 해제 되는 바람에, 전적으로 유투브에 의존하고 있다.

 내 구구절절한 사연은 여기까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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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곡 <Baby one more time>을 처음 들은 건 초등학교 때였다. 당시 나는 케이블TV로 만화채널 '투니버스'를 보는 게 생활이었다. 학원도 그리 많이 다니지 않아서 하루종일 본 적도 있었다. 그 중에 '그 남자 그 여자'라는 만화가 있었는데, 본방은 심야시간대라 보질 못하고, 뮤직비디오(?)처럼 짤막하게 나오는 것을 보았다.

 뮤비 시작부터 끝까지 배경음으로 깔린 게 바로 이 곡이었다. 초등학생이라 영어는 이제 겨우 시작단계여서 뜻을 몰랐다. 그러나 리듬이 계속 머릿속에 남았다.

 

 좀 더 자라고, 가사의 뜻을 해석할 수 있게 된 시점에는 내용이 이해되지 않았다.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걸 경험하고 있긴 했지만, 엄밀히 따지면 설익은 감정의 연속이었다. 그래서 깊이있질 못했다.

 그리고 20대를 맞이하고 있는 지금. 삶을 살아가고, 그러면서 이런저런 사람 사는 이야길 듣고, 남들이 연애하는 걸 보면서 많은 걸 느끼고 있는 이때가 돼서야 <Baby one more time>을 조금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결정적으로, 최근에 어떤 일을 겪었기 때문이다.

 

 친하게 지내는 친구 둘이 있다. 하나는 남자고, 하나는 여자다. 그리고 어느 날 둘은 사귀기 시작했다. 몇 년을 사귀던 그들은, 깨졌다. 깨지기 전에 여자가 정말 많이 힘들어했고, 남자는 여자를 이해하지 못해 힘들어했다. 참다참다 폭발해서, 양쪽 모두 헤어지는 데 동의했다.

 그 뒤, 몇 번 둘을 따로따로 만날 기회가 생겼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주고받다가 어쩌다 연애사가 나오면 묵묵히 듣기만 했다. 남자는 여자에게 잘해주지 못한 데에 후회가 컸고, 여자는 남자에게 받은 상처 때문에 힘들어했다. 여자는 그와 마주치는 것 자체를 꺼려했다.

 

 그래서 그런 줄 알았는데, 얼마 전에 여자쪽의 솔직한 속내를 듣게 되었다.

 자기는 지금, 그 남자가 자기 곁에 없어서 너무 외롭고 힘들고 괴롭다고.

 다시 돌아와주었으면 좋겠다고.

 중간에서 늘 둘의 연애를 지지하고 응원해줬던 나는, 가만히 듣기만 했다. 의외라고 생각하면서.

 

 지금 이 스토리뷰(필자가 멋대로 만든 용어. Story+Review='Storyview')를 적으면서도 <Baby one more time>을 듣고 있다. 가사를 찬찬히 생각하면서 들으면 두 사람이 생각난다. 특히 여자쪽이. 그녀가 토로했던 속마음과 이를 겹쳐 들으면, 이 가사의 고백이 얼마나 처절한 건지, 내가 남자임에도 조금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스무 살 때 읽었던 에세이의 한 구절이 생각났다.

 '남자는 (여자의 마음 속에)들어가려 하고, 여자는 조금씩 자리를 내준다.'

Posted by 비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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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하늘

등산 여정/이미지 2012. 5. 31. 10:22

참조 사진:

http://thehobbit.tistory.com/157

 

 좀 칙칙한 색을 띤 하늘. 금방이라도 비가 쏟아질 것 같이 먹구름이 잔뜩 끼어있다.

 

 "보고 싶다."

 창가에 걸터 앉은 내 친구는, 방금 그렇게 중얼거렸다.

 "누가?"

 "어머니, 아버지, 용수, 철민, 지선, 유준.. 다."

 "왜. 연락할까? 여기로 오라고?"

 "아니. 아니야."

 그는 대뜸 윤동주 시인의 <별 헤는 밤>을 읊기 시작했다.

 "..별 하나에 아름다운 말 한 마디씩 불러 봅니다. 소학교 때 책상을 같이했던 아이들의 이름과, 패, 경, 옥, 이런 이국소녀들의 이름과, 벌써 아기 어머니 된 계집애들의 이름과.."

 "야 임마. 아침인데 별이 어딨다고 별 타령이냐."

 나는 그렇게 핀잔을 주었지만, 그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었다.

 "너는 내 친구 맞지?"

 "그럼."

 

 그는 초점 없는 눈으로 창 밖을, 정확히는 아래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저기 꼬물꼬물 움직이는 게 다 사람이야. 다들 열심히 살고 있는 것 같아. 우리도 그렇고."

 "그치."

 "그런데 저 중에는 '믿는다'는 행위가 가능한 선한 사람이 몇이나 될까?"

 사람을 너무 좋아해서 탈인 이 친구는 얼마 전, 친하게 지내던 거래처 직원에게 큰 사기를 당했다. 결과로 그는 징계를 받았고, 열정적인 마음에 상처를 입었다.

 "글쎄. 없지 않을까? 야, 나도 믿지 마."

 그는 내 답이 마음에 들었는지 껄껄 웃었다.

 "어이, 개독교인. 하나만 묻자. 니네가 믿는 하나님이랑 예수는 우리를 사랑한다면서?"

 "그래."

 "그런데 삶은 참 팍팍하잖아. 꼭 내가 그런 일을 당해서가 아니라, 평소에도 말이야. 하루하루가 참 힘들잖아."

 "그렇지."

 "이게 사랑이냐? 너네 신은 변태야?"

 차근차근 설명하듯 이야기 해주려다 문득, 그럴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너네 신'이 아니래도. 그럴지도 몰라. 하나님은 질투하시는 분이라는 말이 성경에 있어. 우리 사랑을 받지 못해서 질투하신다고. 세상이 가면 갈수록 악해지고, 희망이 없어지는 까닭은, 우리가 하나님에게 의지하도록 하려는 걸지도."

 그는 특유의 웃음으로 말을 이었다.

 "네가 날 아무리 전도하려 해도, 난 종교 같은 덴 관심 없어. 신이 어딨다고."

 "몇 년 전만 해도 나도 그랬지. 그래서 네 심정이 이해가 간다."

 나는 그의 눈을 쳐다봤다.

 "어쨌든 세상에는 너를 사랑하는 존재가 있다는 사실 하나는 기억하길 바라. 네가 아무리 신을 믿지 않는다고 해도, 그거 하나는 정말 큰 위안이 될 테고, 언젠가는 하나님께 돌아올지도 모르지, 나처럼."

 "하여간 종교쟁이들은."

 그는 귀찮다는 듯 자리를 떴다.

 

 창 밖으로 넓게, 도시가 있다. 차가, 사람이, 비행기가, 왔다갔다한다. 그 풍경 위에 하늘이 펼쳐져 있다. 불현듯 먹구름이 좌우로 갈라진다. 강렬한 햇빛이 비친다. 길을 걸어가던 사람이 잠시 멈추고 하늘을 올려다본다. 그는 나를 보지 못하지만, 나는 그를 본다. 형언할 수 없는 복잡한 표정이다. 이윽고 다시 구름이 해를 가린다. 그는 가던 길을 걸어간다. 그러다 아쉬운 듯 하늘을 다시 올려다보고, 불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다.

 나는 그를 보며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괜찮아요, 지금 당장 보이는 건 먹구름 투성이인 하늘이지만, 잠깐 나타났던 '강렬한 햇살'은 언제나 당신을 비추고 있습니다."

 나는 그 자리에 서서, 한참동안 하늘을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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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비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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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2012. 5. 20. 1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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