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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회 예배가 끝나고, 뚜벅뚜벅 걸어 교보문고를 들렀다. 딱히 뭘 살 생각은 없었다. 그냥 오랜만에 들르자는 생각으로 갔다(실제로 내 지갑에는 책 살 돈도 없었고 말이다). 고등학생 시절, 학교가 그 근처라 일주일에 한 번 꼴로 갔다. 책을 좋아하는 게 가장 큰 동기이긴 했지만, 어느 순간부터는 서점 자체를 더 좋아하고 즐기게 되어 방문하는 경우가 늘었다.

 

 고등학생 때나 지금이나 사실 서점에 들르는 이유는 같다. 그리고 대개 방문목적이 뚜렷하지 않은 것도 여전하다. 흥미로운 책을 좀 읽으러, '책 냄새'를 맡으러 가기도 하고, 사람들을 관찰하기도 하고, 또 다른 사람들은 무슨 책을 읽고 있나 겉표지도 훑어보고, 베스트셀러 코너에서는 이건 뭐고 저건 뭐고. 응? 이게 왜 이렇게 잘 팔리는 거야? 아. 이게 이거한테 밀린다니.. 혼자 품평회를 하기도 하고. 여기저기 정처없이 돌아다니다가 신기한 서가에 가서 아무거나 뽑아 '우와, 이런 것도 있네.'하고 감탄하기도 하고. 

 그럼 서점에서 책을 사는가? 사실 거의 그렇지 않다. 사기로 마음 먹은 책이 있으면 인터넷에서 주문한다. 심지어 서점에서 좋은 녀석을 발견해도, 집에 가서 나중에 천천히 주문한다. 현장에서 사는 경우는 그 책이 급하게 필요할 때나, 당장 읽고 싶어서 답답할 때, 혹은 꼭 서점에서 사야겠다는 생각이 드는 것만 해당된다. 다시 말해 현장구매에 대해서는 관대하지 않다. 서점에는 '책과 놀러(Play with Book)' 가는 것이다.

 하지만 최근 들어 서점에 가는 목적이 하나 더 추가되었다: 독서에 대한 자극을 받기 위해. 아니, 자극 정도가 아니라 '도발' 당하기 위해. 오늘도 뼈져리게 느낀 거지만, 아. 맛있어 보이는 책이 얼마나 많던지! 그 중에는 슬쩍 훑어봤을 뿐인데 바로 사고 싶은 토실토실한 녀석도 있었고(나는 도서관에서 빌려보는 편이라 어지간해서는 사고 싶다는 생각을 안 하는데..), 관심은 가는데 도서관에 없어서 잠시 접어둔 녀석도 있었고, 속 내용을 직접 보고 싶은데 '재고없음'으로 뜬 녀석 등등. 온갖 도발을 그대로 보고만 있어야 했다.

 

 그래서 나는 지금 컴퓨터 앞에 앉아 조금 약오른 심정을 차분하게 하기 위해 자판을 두드리고 있다. 세상에 맛있는 책이 저렇게 많은데 다 읽어볼 수 없다니. 살아온 날보다 살아갈 나날이 더 많지만, 그래도 평생 열심히 책을 읽어도 저걸 다 접할 수 없다니. '비통함'보다는 '아까움'이다. 보물이 그득히 쌓여 있는데 자루가 작다거나 담을 시간이 모자라서 포기해야 하는 심정이라고 하면 적절한 비유일런지?

 그래서 동시에, 1초 1초 시간을 무척 소중히 여겨야겠다는 자극 또한 받는다. 펑펑 낭비하며 허송세월하는 시간에 다른 의미 있는 일을 한다거나, 책을 읽는다면, 좀 더 밀도 높은 삶이 되겠지?

 

 책 살 돈도 없으면서 나는 대형서점에 들른다. 책과 놀기 위해. 책에게 도발당하기 위해. 동시에 시간을 귀하게 써야겠다는 자극을 받기 위해.

Posted by 비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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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명콘서트 - With Sea

장소
국립극장 해오름극장
출연
공명
기간
2012.05.12(토) ~ 2012.05.13(일)
가격
R석 60,000원, S석 40,000원, A석 20,000원
글쓴이 평점  

(현재 진행중인 <With Sea>가 공연정보에 없어서 이것을 넣었는데.. 대학로예술극장 3관에서 진행되고 있다. 자세한 일정과 시간은 검색해보시라.)

 

 "꼭 다시 보러 오고 싶다."

 1시간 반의 공연동안 여러모로 참 즐거웠다. 여러 의미에서 신선했다. 생전 처음 보는 악기들(심지어 연주자가 직접 만든 것도 있고.), 손수 찍은 영상, 토크쇼를 생각나게 하는 편안한 분위기, 바다를 보며 느낀 감성을 그대로 전해주려 한 노력의 흔적, 신명나고 특색 있는 연주.

 소셜커머스를 통해 알게 되어 싼 값에 봤는데, 정가로 봤어도 무척 만족했을 것이다(아직 학생이라 50%할인 적용이 가능한 게 감사!^_^). 현금이 없어서 현장에서 앨범을 사지 못한 아쉬움도 있고.

 

 음에 대한 '기억'은 시간이 지난 지금 잊어버렸지만, 무언가 꽉 찬듯한 '느낌'은 잔잔하게 남아있다. 마치 바다처럼, 파도처럼.

 '공명', 앞으로도 공연이나 앨범이나, 주목해야지 ^^

Posted by 비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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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근하고서 할머니 댁을 찾아갔다. 집에서 출발하는 것보다 근무지에서 출발하는 게 더 가깝기도 하고, 복지관에서 돌아오신 뒤라 댁에 계신 까닭이었다. 두 달 전에 찾아갔었지만, 그새 길을 잊어버려 위성지도와 로드뷰로 검색했다.

 

 할머니가 사시는 곳은 몇 십년 전만 해도 힘차게 발전했지만, 지금은 쇠락한 동네다. 그때문인지 어렸을 적 풍경과 거의 일치했다. 달라진 게 있다면 길 양 옆으로 있던 사무실 건물들이 조금 바뀌었다거나, 리모델링을 해서 새로워진 집이 있다는 것 정도. 그리고 꼬마였던 내가 커져서, 길 폭이 좁아지고 벽이 낮아진 것처럼 느꼈다는 것.

 길을 걸으며 지난번과 같은 생각을 했다. 변한 게 없다, 생각보다 가깝다, 그런데 난 왜 이제서야 여길 찾아왔을까? 할아버지도 살아계실 때 왔으면 더 좋았을 걸. 아직 할머니라도 계셔서 다행이다. 더 자주 찾아봬야지.

 

 할머니는 저녁식사도 마다하시고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는 데 집중하셨다. 이런저런 사는 이야기, 생각들, 어렸을 적 에피소드 등. 같이 이야기하는 것만으로도 할머니께는 큰 힘이 되는 것 같았다. 이젠 연세가 있으셔서 머리도 새하얗고, 거동도 불편하시지만, 이야기할 때만큼은 예전과 다를 게 없으셨다.

 한 시간 반 정도, 내내 이야기를 나누다가 작별하고 집으로 돌아갔다. 가는 길에 많은 생각이 떠올랐다가, 가라앉았다가, 다시 튀어올랐다가, 잠잠해졌다. 이게 뭘까? 스스로에게 설명하려고 해도 뭐라 말해야 할지 모르겠는 이 느낌은. 앞으로 자주 찾아뵈면서 이 묘한 느낌을 좀 더 구체적으로 끌어내리라.

 

 가끔 할머니께 찾아가는 게, 본인은 물론 나에게도 정서적인 안정을 가져다주는 것 같다. 알게 모르게 큰 영향력을 미친다. 내 마음에.

Posted by 비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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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놀 천사

저자
아사다 지로 지음
출판사
노블마인 | 2010-10-06 출간
카테고리
소설
책소개
지금 당신에게는 추억하고 싶은 사람이 있습니까?일본문단을 대표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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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문학 책을 읽다가 지쳐 도서관(사실 '문고'라고 하는 게 더 맞을지도..)으로 향했다. 산뜻하고 읽기 쉽게 잘 쓴 저작이었지만, 예전부터 문학을 훨씬 선호했던 탓에, 목말랐다.

 

 서가를 둘러보며 무엇을 고를까 고민하는데 아사다 지로의 작품들이 늘어선 게 보였다. <프리즌 호텔>, <지하철>등등.. 그 중 <저녁놀 천사>를 골랐다. 서가에 있는 지로 작품은, 굳이 구분하자면 둘 중 하나였다. 유쾌하거나 감성을 자극하는 아릿한 것이거나. <철도원>, <지하철>, <칼에 지다>를 읽었고 그때문에 지로를 좋아하게 된 나로서는, 유쾌한 작품은 선뜻 집어들기 망설여졌다.

 단편소설집이라 호흡도 적당했고, 가슴을 적시는 좋은 이야기들도 많아 이번에도 만족스러웠다. 표제가 된 <저녁놀 천사>의 마지막 두 문단은 뭉클한 감동을 선사해주었다. 그렇게 깊게 들어가지 않아서 '내용 전게는 이게 끝?'하고 생각했는데 마음을 요동치게 하기엔 충분했다. <차표>는 '유년시절 헤어진 좋은 사람에 대한 추억'이란 소재 자체가 좋았다. 나도 그런 사람들이 있어서 공감 되었다. <특별한 하루>는 제목과 반대되게 무덤덤하고 담담한 주인공과, 반전, 그리고 끝까지 조곤조곤한 마무리가 좋았다. 나라면 어땠을까? <호박>은 이해가 부족하여 다시 읽어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언덕 위의 하얀집>은 온다 리쿠의 소설과 착각할 정도로 달콤한 동시에 오싹했다. <나무바다의 사람>은 윤동주님 작품 <자화상>을 떠오르게 했다. 시공간의 왜곡이든 환영이든, 내가 나를 만났다면? 어떤 느낌이고 그 뒤 무슨 생각을 했을까?

 

 고등학교 때 국어학원 선생님이 '어느 작가의 역량을 보려면 그 사람의 단편소설을 보라'고 말씀해주신 적이 있다. 말마따나 단편소설 여러 편을 보면 그 작가의 문체나 무게 등이 모자이크처럼 드러나곤 했다. 좋아하는 작가 중 이례적으로 단편집을 많이 읽은 지로지만, 동시에 읽을 때마다 실망시키지 않는다. 걸출한 작가다.

 그런 의미에서 다음은 지로의 장편을 선택해보기로 할까..? 글 작성을 마치고 다시 문고에 갈 생각인데, 좀 고민해봐야겠다. 

 

Posted by 비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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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자아성찰을 꽤 좋아하는 편이다(이런저런 사연이 있다.).

 성찰하기 가장 좋은 시간은 오후 10시~새벽 2시다. 그 이전엔, 아직도 분주함이 여기저기 묻어있거나 하루 마무리 수순을 밟고 있지 않는다. 대개. 그리고 2시 이후에는, 집중력도 떨어지거니와 다음날 생활에도 지장이 있기 때문에 바람직하지 않다. 가장 좋은 성찰환경은 고요한 내 방, 책상 앞이다.

 오늘, 오랜만에 성찰이 참 잘 되고 있어서 기쁘다(바로 지금 이 순간!). 하나하나 돌아보고 싶었던 부분들을 글로, 자유로운 형태와 방식으로 풀고 나니 참 개운하다. 그리고 자기 전 이 글을 적으면서, '성찰 환경'에 대해 인식하고 돌아보게 되었다.

 

 인식할 수 있는 최초의 성찰이 이루어진 건 초등학교 고학년 때. 그 환경에서, 이사가기 전인 중3 말까지 지냈다. 우리 동이 단지 끝에 있어 창문 너머가 후문 뚝방길이었고, 정말 조용했다. 차도 사람도 거의 안 지나다니고 키 큰 가로수들과 예쁜 꽃, 풀만 가득했다(지금 돌이켜보면 집 근처에 그런 좋은 장소가 있었다는 게 큰 행운이다. 꼭 방 안에서만 성찰한 게 아니라, 그 뚝방길에 반은 자연적으로, 반은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산책로를 걸으면서도 사색을 많이 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세 번 이사를 했는데, 그때가 가장 조용한 환경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언덕 도로를 올라가면 차들이 쌩쌩 달리기 때문에 소리가 안 나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요했다. 가장 우울하고 힘든 시기를 가장 좋은 사색환경에서 보냈다는 게, 참 기묘한 일치다.

 

 그 다음으론 고등학생 시절과 대학교 1학년, 그리고 스물 하나의 절반을 보낸 고층집이 있다. 집에서 지하철역은 엎어지면 닿을 거리에 있었다. 다시 말해 대로 바로 옆이라서, 소음에 쉽게 노출될 수 있는 환경이었다. 그러나 감사하게도 차 소리가 그렇게 크진 않았고, 무엇보다 내 방은 대로와 가장 멀리 떨어진, 단지 안을 넓게 조망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

 햇살이 잘 들어서 낮시간을 좋아했지만, 저녁시간도 그에 못지 않게 좋아했다. 책상 앞에 앉아 이것저것 숙제나 공부를 하다가 고개를 오른쪽으로 틀면, 불을 밝힌 각 세대의 모습이 한눈에 들어오기 때문이었다. '다들 저 속에서 뭘 하고 있을까?'라는 생각은 기본이었다. 저녁시간대 모습을 기억해두었다가 새벽시간에 다시 밖을 보면, 극명하게 차이가 드러난다. 불이 켜진 세대가 거의 없다. 그때마다 '바쁘게 사는 것'이나 '밤이 주는 휴식'과 같은, 대비적인 주제로 글을 쓰곤 했다. 모의고사나 시험을 앞둔 새벽이면 더 밤에 젖어들었던 것 같다. 이 시기 이후로 밤을 더 소중하게 생각하게 되지 않았나 싶다.

 

마지막으로 작년 하반기에 이사 온 지금의 환경이 있다.

 여기도 고층이라면 나름대로 고층이지만, 좀 애매한 높이다. 책상에서 이것저것 하다가 고개를 들면 바로 밖을 볼 수 있지만(창이 정면에 있다.), 배란다가 가로막고 있어 고등학생 때 성찰환경에 비하면 형편없다. 굳이 배란다로 나가 밖을 보면, 방이 도로 쪽이라 차들과 낮은 건물들만 보인다. 그다지 볼 게 없다. 그렇기에 한 가지 장점은 확실한 듯하다. 책상에서 하는 일에 집중할 수 있다는 것. 한 가지 생각을 쭉 이끌고 가다가, 주변 환경을 보고 다른 생각이 유입되어 흐지부지 되는 일은 없다는 것.

 물론 지금 환경이 단점만 있는 건 아니다. 생각건대 이곳은 낮에 강점이 있다. 우선 해가 적당하게 잘 든다. 기분 좋을만큼 든다. 그래서 낮시간이 상쾌하다. 또한 낮에는 멀리 산이 보인다. 아득히 먼 것도 아니다. 딱 알맞게 잘 보인다. 기분전환하고 싶을 때마다 산등성이를 천천히 훑고 있으면, 방 위치가 매우 만족스럽다.

 

 성찰환경에 대한 성찰은 처음인데, 해보니 이런저런 추억도 떠오르고 참 좋다. 현재 장소에 대해 좀 더 애정을 가지고 인식하게 된 부분도 있고. 이후에도 이 글을 여러 번 수정하면서 더 '어루만지기'해야겠다.

 언제 또 어디로 이사를 가게 될지, 어떠한 사색 장소를 발견하게 될진 모른다. 다만 한 가지 확고한 바람이 있다. 자아성찰환경이 나에게 잘 맞아서, 성숙해가는 데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것이다.

 

 길었다. 그만 자자.

 

Posted by 비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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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 아침, 입에서는 한숨과 욕이 나오면서도 머릿속으로는 '아, 그런데 이 상황은 어떻게 감사하면 좋지? 감사할 부분을 궁리해봐도 짜증만 나는데..'라는 고민을 하는 스스로를 발견하고 참 많이 놀랐다. 어떤 상황이었는지 적어두고자 한다.


 어제는 굉장히 늦게 잤다. 2시 즈음 잠들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새벽기도를 가려면 5시, 늦어도 5시 반에는 일어나야 했기 때문에 바짝 긴장한 상태로 잠들었다. 그게 효과가 있긴 했는지 4시 50분에 깼다. 그러나 '10분만 더'라고 생각하다가 결국 7시에야 일어나고 말았다. 기도회는 이미 끝났고, 1시간 뒤에 있는 헤드회의도 제시간에 갈 수 있을지 아슬아슬한 상황이었다. 집에서 사무실까지 45분 정도 걸리니까.

 황급히 나갈 채비를 하고 현관으로 뛰쳐나갔는데, 나가려고 신발을 신는 찰나 동생이 맞춰놓은 알림이 울렸다. 방문을 열고 일어나는 걸 확인한 뒤 집을 나섰다. 그런데 아뿔싸, 1초의 차이로 엘리베이터가 내려가버렸다. 게다가 그리 높은 층도 아닌 3층에서 서는 것이 아닌가. 속에서 이것저것 여러 생각이 들끓었다. 물론, 좋지 않은 감정이었다.

 마음을 달래고, 1층에 내리자마자 황급히 버스정류장으로 달렸다. 나오기 전에 버스어플로 도착예정시간을 확인했던 바, 거의 근접했기 때문에 일단 달렸다. 그런데 근접해도 너무 근접해있었다. 정류장이 보이는 길로 나오자 이미 버스가 정류장을 향해 가고 있었다. 승객이 한 명 있었기에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계속 달렸는데, 버스기사 아저씨는 승차 문 근처까지 온 나를 발견하지 못하고 그냥 휑 떠나버렸다.

 이 시간대 버스 배차간격은 8~10분. 환승할 5호선은 배차간격 10분. 지각은 거의 따놓은 당상이었다. 내가 아침에 일찍 일어나서 새벽기도를 가지 못한 게 문제였으나(헤드회의는 새벽기도를 나온다는 전제 하에 그 시간에 진행되니까.), 한편으론 그 몇 초가 정말 화가 났다. 동생을 깨우지 않았으면 엘리베이터를 잡을 수 있었을 텐데. 3층에서 누르지 않았다면 잡을 수 있었을 텐데. 버스가 몇 초 더 기다려주었다면 타고 갈 수 있었을 텐데. 입에서 한숨과 욕이 나왔다.

 다음 순간, '그런데 이걸 어떻게 감사의 제목으로 삼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스스로도 정말 놀라운 발상이었다. 지부사역으로 섬기는 교회의 2013년 표어가 '감사하면 행복합니다'라서 평소에도 감사노트를 적고 있긴 했다. 그런데 이렇게 실제적으로 사고의 변화가 일어난 것을 확인하니, 그저 놀라울 따름이었다.

 이런 태도가 하나님 보시기에 마음에 들었는지 모르겠지만, 다행히 회의는 딱 5분 늦었다. 그 5분도 서로 이런저런 이야기 나누느라 정식으로 시작되진 않은 상태였다. 그때 깊이 감사했다(웃음).

 앞으로도 감사를 삶의 원동력으로 삼으며, 건강한 마음을 가질 수 있길 바라고 기도해야겠다. ^^

Posted by 비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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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 연예인아!"

 

 요즘 친구들이 나를 지칭하는 말이다. 이 호칭을 들은지 몇 달 되었다. 처음엔 '뭐가 연예인이라는 거야?' 싶었지만, 요즘엔 수긍하고 있다. 그다지 바쁘지 않을 것 같은데 여기저기 참 바쁘게 돌아다닌다. 아침에 나가서 집에 들어오면 통상 10시, 11시. 방을 치우고 싶어도 집에 오면 피곤해서 바로 씻고 잠들게 된다. 다음날 새벽이면 새벽기도 가느라 일찍 집을 나선다.

 이렇게 바븐지도 모르다가, 며칠 전에 친구들이 하루 일정을 이야기 해달라고 했을 때 비로소 바쁘다는 걸 인지하게 되었다. 방에서 푹 쉬고 있는 지금, 이러한 새로운 인식이 조금 당황스럽다. 내가 이렇게 바쁠줄이야. 2주 뒤에 군사훈련 받으러 논산 가는 것도 실감이 나질 않는다. 그냥 이렇게 바쁜 와중에 시간 가다가, 훈련소에 뚝 떨어질 것 같다. 그때 정신상태는 괜찮으려나 모르겠네. 너무 극과 극인 환경이니.

 

 서원한 것은 그럭저럭 잘 지키고 있다. 지난 7년 간의 관습과 관성 때문에 힘들지만, 그래도 이 정도면 정말 잘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1월달에 집중해서 변화시키기로 한 습관은 '절반의 성공'이다. 2월달은 훈련소에 있으니 아무래도 그 부분에 대해서 고민해볼 필요가 있겠다.

 남은 1월도 알차게 보내서, 행복한 마무리가 될 수 있길 바라본다.

Posted by 비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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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나요. 원곡가수 조성모.

 원곡이 나왔을 때 나는 초등학교 저학년(아마 2학년 즈음이었던 것 같은데..)이었다. 그런데도 <아시나요>나 <다짐> 이 두 곡에 대한 인상은 뚜렷하게 남아있다(전자는 뮤직비디오의 한 장면 때문이고, 후자는 라이브 방송에서 조성모가 입고 있던 특이한 의상 때문이다.). <아시나요> 뮤비 마지막 부분에 조성모가 소녀를 끌어안고 괴롭게 울부짖는 장면이 기억에 확 박혔다. 스토리도 가사도 잘 알지 못하고, 다만 그것만이 남았다. '무슨 일이지? 왜 저 사람은 저렇게 울부짖지?'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 덕에 멜로디도 귀에 익어, 가끔 노래방에서 부르곤 했다. 키를 낮춰서 간신히(웃음).

 

 최근, 더 원이 <아시나요>를 불렀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사랑아>덕에 좋은 인식을 가지고 있는 가수라, 버스 안에서 친구와 함께 들었다. 경연 당시 동영상으로. 다 듣고서 받은 인상은, '잘 부른다'와 '기본 곡에 완전히 자기 색깔 입혀서 변형시켰네'였다. 특히 후반부의 독백은 '실험적인 편곡인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애절한 감정을 더 끌어내기 위한 장치라는 느낌 또한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나중에, 이 곡의 사연을 알게 되었다. 가수 되는 것도, 제대로 술 한잔도 기울여보지 못하고 먼저 가신 아버지께 바친다는 것. 그러고 나서 전체를 들으니 가슴이 저려왔다. 특히, 부정적으로 생각하고 있었던 독백 부분은 도리어 눈물샘을 가장 강하게 자극했다. 

 "들리,십니까? 제 목소리가. 소리칩니다. 제 목소리가, 하늘에! 닿을 때까지~예~"

 "아시나요, 들리나요, 내 말들이~ 가슴 속에 맺힌 수많은 말이~"

 

 돌아가신 아버지께 바친다는 이야기를 배제해도, 가슴 속에 맺힌 게 많은 나는 '가슴 속에 맺힌 수많은 말이~'라는 부분이 그렇게 공감되고 아플 수가 없었다. 하고 싶어도 하지 못했던 말, 솔직하지 못했던 말, 꺼냈다가 애써 돌려서 숨겨야만 했던 말.. 잊었으면 좋겠는데 문득문득 떠오른다. 나 같으면 벌써 눈물 펑펑 흘려버렸을 텐데. 감정 절제하는 것 보면서 '가수는 다르다'는 인상을 받았다.

 

 그렇게 한바탕 아파하고 나서 또 감상하니, 가사가 참 좋다는 걸 새삼 느끼게 되었다. 서정적인 감정에 젖어 노래로 풀고 싶을 때, 이 노래를 들어야겠다. 바라기는, '가슴 속에 맺힌 수많은 말이'라는 대목에서 더 이상 마음이 저릿하거나 힘들지 않을 날이 왔으면 좋겠다.

Posted by 비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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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엇인가 이야기를 꺼내고 싶어서 '글쓰기'를 펼쳐놓고 있다. 그러나 정작 무엇을 쓸 것인지는 구체적으로 떠오르질 않는다. 한 편의 글을 엮어내고 싶은 마음만 있을 뿐이다. 오랜 시간, 하얀 화면에서 껌뻑이는 커서를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지만 여전히 달라지는 건 없다. 아깝다. 이 상태에서 글감이 확실했다면 또 하나의 글을 남기는 건데 말이다.

 오랜만에 마주하게 된, 글쓰기 애매한 순간을 달래보려 이렇게 글을 남겨본다.

Posted by 비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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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편지'를 적극적으로 쓰기 시작한 건 고등학교 2학년 때가 처음이다. 엄청 좋아하는 친구에게 '서프라이즈!'를 선사해줄 생각으로 시작했다. 거기에 맛들려서 약 2년을 열심히 썼다. 시간이 흐르며 대상도 그 친구 한 명에서, '친하고 아끼고 소중하게 생각하는 사람들 대부분'으로 확대되었다.

 

 그리고 작년 하반기부터 편지쓰기가 시들해졌다. 이런저런 사연들이 있지만 그걸 곱씹자니 마음만 아플 것 같고, 파고파고 들어가면 부정적인 요소만 잔뜩 드러날 것 같다. 하여튼 수그러들었는데, 그 중 하나가 편지쓰는 것에 대해 무서움을 느꼈던 까닭이다. 무슨 무서움이냐면?

 컴퓨터 하드디스크나, 책장이나, 클리어파일을 뒤지다보면 가끔 쓰다만 편지나 써놓고 보내지 않은 편지들이 등장한다. 종이 위에 고정된 시간이 활자화되어 녹아있다. 대부분은 '그땐 이랬네.'나 '여전하네, 이런 부분은.' 같이 좋은 추억과 감정을 고양시키는 내용이지만, 어떤 편지는 마음이 아프기도 하다. 수신자가 당시엔 사이가 좋았다가 지금은 확 틀어진 친구라거나, 꼭 말하고 싶었던 내용이지만 시기를 놓쳐 말하기도 애매한 것이라거나.. 하는 것들.

 이것들을 보며 나는 내가 보냈던 수많은 편지와 내용들에 대해 되새기게 되었다. 그리고 내가 이를 다 기억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 현재는 그때와 정반대의 생각, 감정을 가지고 있을수도 있다는 사실, 무엇보다 상대가 그 글을 보관하고 있으며 원하면 다시 꺼내어 볼 수 있다는 사실 때문에 무서움을 느꼈다. 말에는 분명히 책임이 따른다. 그런데 그 책임을 질 수 없는 경우가 편지글에선 꽤 치명적으로 발생할 수 있는 것이다.

 편지를 열심히 쓰던 시절, 나는 시간이 막대하게 걸려도 '상대에게 이만큼 시간을 할애한다는 건 좋은 일'로 생각하고 기쁘게 헌신했다. 그러나 이제는 좀 머뭇거리게 되고, 내용도 훨씬 보편적이게 되고, 짧아졌다. 위에서 말한 '변화의 가능성'과 '책임' 때문이다. 내용이 상당히 간결해졌다는 점에선 고무적이지만, 왜일까. 과도기라 그런지 요즘은 '편지쓰기' 행위 자체가 많이 혼란스럽다.

 

 이제 나는 편지에 '뿌리'를 담아내는 연습을 해야겠다. 그래야 세월 속에서 어떤 변주가 이루어지더라도 나의 편지가, 내용 대부분이 유효할 테니까.

Posted by 비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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