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력

52024  이전 다음

  • 1
  • 2
  • 3
  • 4
  • 5
  • 6
  • 7
  • 8
  • 9
  • 10
  • 11
  • 12
  • 13
  • 14
  • 15
  • 16
  • 17
  • 18
  • 19
  • 20
  • 21
  • 22
  • 23
  • 24
  • 25
  • 26
  • 27
  • 28
  • 29
  • 30
  • 31

#2

2012. 5. 5. 22:29

보호되어 있는 글입니다.
내용을 보시려면 비밀번호를 입력하세요.

#1

2012. 4. 30. 01:14

보호되어 있는 글입니다.
내용을 보시려면 비밀번호를 입력하세요.

 내가 사는 동네는, 모여서 술 먹고 놀만한 장소로 유명한 곳이다. 신천. 늦오후부터 사람의 왕래가 늘기 시작하고, 저녁엔 본격적으로 무리지어 여럿이 다니기 시작하고, 10시 이후엔 '삐끼'들이 손님을 끌기 시작한다. 그리고 여기저기서 술에 취해 비틀거리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같은 방향으로 가는 택시를 붙잡고.. 유흥가. 홍등가다. 신천은 '흥청망청'이라든가 '낄낄낄'이라든가, 그런 수식어가 잘 어울리는 분위기를 지니고 있다.

친구들과 모이면 나도 이 거리로 오긴 하지만, 밥 먹고 이야기하고 가끔 노래방 가는 데 그칠 뿐(요즘 들어는 뜸해졌다.)딱히 '유흥'은 잘 모른다.

 

 며칠 전 저녁에 신천 거리를 지나는데, 한 주점 앞에서 MOT의 <카페인>이 큰 소리로 재생되고 있었다. 고3때, 생일선물로 받은 MOT 1집에 있던 곡이라 귀에 익숙했다. 한 5분쯤 되는 곡인데, 지나갈 때는 마침 내가 가장 흥미롭게 듣는 부분이 흘러나왔다.

 

...늘 깨어있고만 싶어

모든 중력을 다 거슬러

날 더 괴롭히고 싶어

더 많은 허전함을 허전함을 내게..

 <카페인>에 대해 '스페이스 공감'에 나온 한 줄 해설을 보니 "잠과 중력 등 스스로를 속박하는 것들을 떨쳐내고자 하는 자유의지를 일상의 언어로 담백하게 표현했다."라고 적혀 있었다. 신천의 분위기와, 저 대목과, 해설.. 참 재밌다는 생각을 했다.

 비틀비틀, 2차 가자!, 헤헤헤, 낄낄낄, 이년아 저년아, 클럽 가실래요 싸게 해드릴게요 물 좋아요.. 번쩍번쩍, 휘황찬란, 흐느적흐느적, 우웩.우웩. 빵빵..

 

 밤새 깨어서 중력은 물론 시간도 거스르고 있는 사람들. 감당할 수 없는 술담배 그리고 약간의 환각제로 자기를 괴롭히고, 뒷길 모텔 어느 방 안에서 욕정 어린 몸짓을 나누며 뒤엉켜서, 행복하다고 착각하는 사람들. 그럴수록 더욱 깊어지는 허전함. 더 많은 허전함을 허전함을 내게.

 그리고 이는 모두, 속박하는 것들을.떨쳐내고자 하는 자유의지. <카페인>에 나오는 모든 고백(가사)은, 일상의 언어로.담백하게.이루어져 있다.

 

 아아 고거 참, 재밌네. 멋진 역설 아닌가.

'등산 여정 > 이미지' 카테고리의 다른 글

#2 불완전한 왕좌  (0) 2012.06.12
잃어버린 지하도  (2) 2012.06.03
#1 하늘  (0) 2012.05.31
화장-1: 04.23 아침의 의문  (0) 2012.04.25
옥상정원, 소설 한 편, 그리고 새 카테고리.  (0) 2012.04.19
Posted by 비류
|

#1 2012.04.23

 아침 일찍에 집 근처 가까운 곳을 갔다 올 일이 있었다. 사람들을 만나야 했지만, 사회적 격식을 차릴 필요가 적은 이른 시간과, 관계였기 때문에 옷을 지극히 편하게 입었다. 추리닝에 반팔, 그리고 남방. 다시 말하자면 가벼운 산책 차림이었다. 그 장소는 걸어가기엔 너무 멀어서, 지하철을 타고 오갔다.

 모임이 끝나고 집 근처의 역에서 내려서 나왔다. 출근시간이라 아파트에서 많은 사람들이 나와 반대방향으로 가고(오고)있었다. 나도 계속 걸었다. 그러던 중 어떤 여성이 눈에 띄었다. 큰 키, 빼쩍 마른 몸, 갈색 생머리, 도화지 화장, 그리고 멀리서도 느껴지는 약간의 허영. 오랜만에 보는 특이한 종족이라 흘끔 쳐다봤다. 눈이 마주쳤는데, 짧은 순간에 많은 메시지가 내게 넘어온 느낌이었다.

 

 '나, 이만큼 꾸몄다. 이 정도면 예쁘다. 그래서 나는 당당하다. 어. 왜 너는 그렇게 안 꾸미지? 왜 그러고 다녀? 부끄럽지 않나?'

 

 이런 시선이 지나가고, 집에 와서는 그 순간에 대해 '?'만이 남았다. 상징적인 행동에 대해 너무 민감하게 반응한 것이라 치부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내가 생각하기 시작한 점은, 위와 같은 생각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에 대해서였다. 그러면서 '화장'에 대한 다양한 답변을 떠올렸다.

 답변을 참고해서 그 여자를, 아니 그 여자가 시선 속에 담았을만한 생각을 이해해보려 했지만, 끝까지 물음표가 남았다. 예쁘다는 인상도 그다지 못 받았고, 외모가 빼어나다는 생각으로 타인을 짓밟으려는 태도도 이해할 수 없었다.

 글쎄. 겉 껍데기는 꾸미기 나름인데. 동생이 공들여 화장하고 나간 날, 길거리에서 마주쳤는데 못 알아본 적이 있었다. 그리고 편하게 생각했던 여자'친구'가 화장을 하고 나와서 설렌 적이 있었다. 그날 집에 들어가서는 다시 둘 다 평소처럼 대했다. 왜? 화장이 해제 된 뒤(동생은 화장을 지웠고, 친구는 카톡으로 대화했다.)였으니까. 눈속임. 남자나 여자나 시각이 주요한 감각이기 때문에, 외모와 화장은 어느 정도 눈속임이 아닐까. 나는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늘 외모보다는 그 사람의 사람 됨됨이를 보려 한다.

 세상에는 워낙 다양한 사람들이 살고 있으니까, 그래. 외모에 천착하는 사람도 얼마든지 있겠지, 하면서 넘어가지만, 그런 사람들이 좀 안타깝다는 생각도 든다.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워'라고 말할 수 있고 이 가사가 공감을 받을 수 있는 이유는, 외모를 기준으로 비교했기 때문이 아니라 한 사람 한 사람의 됨됨이, 참된 속을 보고 말한 것이기 때문이다.

 껍데기로 자신을 드높이려는 그네들의 마음 속은 얼마나 드높아져 있을까. 항상 뻣뻣하게 목에 힘을 주고, 보여지기 위해 살아야 하는 속은. 그리고 집으로 돌아가 혼자 거울 앞에 앉아 화장을 지우고 난 뒤 드러난 자신의 진짜 얼굴을 봤을 때는, 무슨 기분이 들까?

'등산 여정 > 이미지' 카테고리의 다른 글

#2 불완전한 왕좌  (0) 2012.06.12
잃어버린 지하도  (2) 2012.06.03
#1 하늘  (0) 2012.05.31
신천 거리, MOT <카페인>  (0) 2012.04.26
옥상정원, 소설 한 편, 그리고 새 카테고리.  (0) 2012.04.19
Posted by 비류
|

 "화장은 왜 하는 거야?"라고 물었을 때, 다양한 답변을 들었다.

혹자는 '가리는 거지. 얼굴에서 좀 자신 없는 부분을 화장품으로 가려서 예쁘게 만드는 거야.'하셨고,

동생은 '꾸미는 거지. 예뻐지기 위해서'라고 답했고,

어머니는 '남자들이 하는 제일 큰 착각 중에 하나는, 화장을 자기들에게 보이기 위해 한다는 거야. 무슨 소리. 화장은 자기 만족이야.'라고 하셨고,

친구들은 '화장을 하면 자기를 세밀하게 돌아보게 되잖아. 눈은 어떻고 코는 어떻고. 가끔 나도 몰랐던 모습을 보기도 하고, 그래서 신기해.'

'안정감을 느껴. 생각 많고 복잡할 때 화장하면, 마음이 편해지거든.'

 지금 당장 떠오르는 건 이런 답변들이다. 나는 남자에다가, 외모도 그다지 많이 신경 쓰지 않기 때문에 '화장'이라는 복잡/복합적 미술 혹은 기술에 대해서는 늘 '왜'라는 태그를 붙여놓곤 한다. 그래서 앞으로도 계속 답변을 수집할 생각이다.

Posted by 비류
|

 티스토리 메인에 보니 '예수덕후의 7가지 특징'이란 글이 올라와있었다. 인터넷 하다보면 어느 순간 안티크리스천 공간에 들어가 있는 게 습관적인 일이었기 때문에(그만큼 반기독교 정서가 널리 퍼져 있다는 거라고 생각한다.)또 무슨 이야기를 하나 클릭해보았다. 글은 아니고 네이트 덧글을 캡쳐해서 올려놓은 게시물이었는데, 읽으면서 그냥 끄덕끄덕 했다. 나도 고3 전까지는 저러고 있었으니.

 공개글로 적을 것이기 때문에 혹시 이 글의 독자가 있다면, 위 문단을 읽고서 '어휴.. 결국 개독 종자군 쯧쯧'하는 판단이 섰을 것이다. 맞다. 나는 크리스천이다. 당신네들이 그렇게도 싫어하는 '예수 믿으세요'를 주변에 이야기하고, 뻥튀기 판타지라고 이야기하는 십자가 죽음과 부활에 대해 이야기한다.<- 이쯤 되면 벌써 창을 닫았거나, 신나게 욕할 마음으로 손가락을 풀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도 예전엔 열심히 비방하고, 안 믿던 사람이었다. 그러니 키보드로 신나게 공격하기 전에, 내 이야기를 먼저 들어보시라.

 

 '교회'라는 곳에 처음 나가기 시작한 건 초등학교 3학년 즈음의 일이다. 아무것도 모르고 부모님과 같이 나가기 시작했고, 교회라는 곳이 좋았기 때문에 중학교 2학년 때까지 거의 습관적으로 나갔다. 중2 하반기에 하나님에 대해 의문을 품기 시작했고, 고1때부터는 신앙심도 없이 한 달에 한 번 꼴로 '좋은 말씀' 들으러 나갔다. 고1 가을부터는 그마저도 하지 않게 되었다. 당시 나는 작가가 되고 싶어 남들보다 더 많은 지식을 접하려고 했고, 그래서 종교, 신화, 전설등에 대한 이야기는 물론 이에 대한 해석 및 연구자료도 많이 읽었다. 내게는 하나님이 그저 '인간이 의지할 것이 필요해서 만들어낸' 존재에 불과했다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과 부활은 '신화소'쯤으로 생각했다. 이미 이렇게 돌아서버린 상황에, 분쟁이나 다툼을 꺼리는 성격이 있어 '예수천국 불신지옥'이라 외치며 타종교에게 극단적인 태도도 무척 싫어했으니 내가 '안티 크리스천'이 된 건 당연한 수순일지도 모른다. 부모님은 내게 교회 나가기를 계속 권하셨지만 극구 반대했고, 주변에서 친구들이 한 번 나가보자고 권해도 핀잔을 주며 거절했다. 인터넷이나 TV를 통해 자주 접하는 교회, 목회자들의 비리를 보며 '하나님은 그냥 신화'라는 생각이 더 견고해졌다.

 그러다 고등학교 2학년 때, 전교에서 '예수쟁이'로 유명한 아이와 같은 반이 되었다. 그 애는 첫날부터 정자세로 성경책을 읽고 있었다. 그 품새가 너무도 당당했다. '답 없는 종교쟁이'라고 생각하면서도 한편으론 그 애가 초등학교 때와는 전혀 다르게 성품이 변한 걸 보고 호기심이 생겨 말을 걸었다. "나도 몇 년 전에는 하나님을 믿었지만 지금은 없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너에 대한 얘기를 들어보니 장래희망이 선교사라고 하더라, 대체 네가 믿는 하나님이 있긴 하냐." 이렇게 묻자 대뜸 "그럼 기도해보자. 있나 없나는 기도해보면 알 거다."라고 해서, 그렇게 해볼 겸, 호기심의 대상이었던 '광신도'에 대해 탐구해볼 겸 해서 기도모임에 참석하기 시작했다.

 신앙심이 없어서 형식적으로 기도하고, 기도가 다 끝나고 이야기하는 데 주안점을 두었다. 이것저것 이야기하다보니 내가 하나님을 떠나게 된 결정적인 이유가 크리스천들에 대한 상처라는 걸 알게 되었다. 그래서 그 친구가 '건강한 공동체를 소개해주겠다'고 해서 라이즈업을 알려주었고, 제자훈련에 참석하기 전에 우선 집 근처에서 하는 정기집회에 참여했다. 흔한 찬양집회라고 생각했는데 시간이 갈수록 사람들이 '무아지경'으로 빠져들어서 솔직히 무서웠다. 무늬만 크리스천일 때 장로교 교회만 다녔기에 통성기도도 신기했는데 여기저기서 '방언'을 터뜨리니 '혹시 사이비는 아닌가..' 생각했다.

 광신적인 모습을 보고 질려서 기도모임도 드문드문 참석하고, 제자훈련 참석 권유를 거절하기도 여러 번. 크리스마스 저녁 때 예배 없이 조촐한 파티를 한다고 해서 따라갔다. 선물교환, 식사, 간단한 교제 등 따뜻한 분위기가 좋았다. 그러면서 '이런 사람들이 왜 예배때만 되면 그렇게 변하나..?'하는 의문을 품고, 고3 첫주부터 제자훈련에 나가기 시작했다. 지금 돌이켜보면 참 다행이었던 게, 당시 나를 맡은 분이 참 신실하고 따뜻한 분이었다. 그래서 크리스천들에게 받은 상처가 점차 아물기 시작했다. 그 위에 말씀이 심어지니 마음이 열리기 시작했는데, 한 가지 더 감사한 일이 있다. 지부장이신 조휘용 목사님 설교를 듣고 있으면 폭넓은 지식과 세상을 읽는 깊은 통찰력에 감탄하곤 했다. 게다가 조휘용목사님 본인이 하나님을 전혀 안 믿었던 분이니, 그분의 간증을 듣고 나서 '하나님이 있을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3월부터 부모님 몰래 교회에 나가기 시작했고, 공부도피수단인 줄 아셨던 부모님과 잦은 마찰이 있었다. 그래도 꾸준히 신앙생활을 했고, 수능 이후에도 지속했다. 그러나 하나님에 대한 확신의 뿌리가 옅은 상태여서 위태로운 시기였다. 때마침 전국 모든 지부가 모이는 사역자수련회가 열려, 참석했다. 둘째날, 저녁 예배 때 기도 중에 방언이 터지고, 압도적으로 내 속에 임재하시는 하나님을 체험했다. 그 뒤로 나는 '하나님은 살아계시다'는 사실에 확신을 가졌으며, 지금은 주변 혹은 노방전도하다 만나는 안티크리스천들에게 내 간증을 섞어 복음을 전하고, 그들이 가지는 의문에 대해 나름대로 설명을 해주고 있다.

 가끔 복음을 다 들은 뒤, 논쟁을 붙이는 사람들이 있다. 최선을 다하지만 이성이나 논리로 하나님을 설명해 안티크리스천들을 '설득'하기엔 내 지식이 짧다. 세계의 석학들도 명쾌히 해내지 못하는 일을 내가 어떻게 할 수 있을까. 다만 간증이 그들을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할 수 있는 통로라 생각한다.

 안티크리스천이었던 내가, 지금은 하나님을 떠나 살 수 없다고 고백하고, 그렇게 싫어하던 노방전도를 하고 있다는 것. 이 자체가 기적 아닐까.

 

 이 글을 여기까지 읽은 독자님이 하나님을 믿든 안 믿든, 가장 중요한 건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십니다.'이다. 그 사랑을 전하기 위해 크리스천들이 전도를 하는 것인데, 지나친 열심으로 공격적이 되고, 많은 오해를 사면서 본질이 퇴색된 것 같다고 생각한다.

 크리스천들이 자기네만 홀리하다고 하면서 더 싸가지 없고 못되게 사는 것에 대해서는, 안타깝다. 사실 나도 똑바로 살진 못한다. 그러기가 보통 쉬운 건 아니지 않은가. 그래서 매일매일 올바른 삶의 태도를 견지하고 행동으로 옮기려고 처절한 노력을 한다.

 

 친구들은 이렇게 변한 내 모습을 보고 '내가 보기엔 넌 그냥 종교에 홀린 것/빠진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끝까지 믿지 않는다. 안 믿는다는데 어쩌랴. 강요하지 않고, 그냥 가끔 이야기만 꺼내고 만다. 싫어하면 안 하고. 앞서 말했지만 내가 극단적 전도행위를 싫어했기 때문에. 내가 무슨 설을 풀어놔도 안티들 눈에는 다 '똑같은 종족'으로 보이겠지만, 한때 안티크리스천이었다는 점에서 당신들에게 조금 더 설득력 있을 수는 없을까?

 

 제아무리 과학적으로 완벽한 설명이 완성된다 하더라도 결국 마음이 열리지 않으면 끝까지 믿지 않는다.

 다만 나는 그 사람들에게 말해주고 싶다. '변절자'의 삶이 나에겐 더 축복되고 기쁘다고.

(아마 이 문장을 보고 끝까지 '쯧쯧.. 종교에 홀리면 사람이 망가진다니까.'라고 하겠지만.)

Posted by 비류
|

 일 할당량을 다 채우고 어기적어기적 사무실로 올라갔다. 같이 일하는 친구가 월차 내서 더 힘든 하루였으니 나에겐 '좋은 휴식'이 필요했다. 자리에 가서 가져온 책을 집어들었다.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 그리고 다시 옥상으로 올라갔다.

 누군가의 꿈이었을 거다, 이 건물. 아무리 생각해도. 휘황하게 뭔가 거대하게. 내가 이해할 수 없는 사상도 깃들여 있겠지. 전체 건물 구성을 보면 아마 '복합체'를 생각했을 거다. 좀 더 오버하자면, 코스모폴리탄? 알다가도 모를 일이지. 현실은 암울하니까. 오늘 거대언론에서 작정하고 이곳을 타깃으로 삼았던데, 앞으로의 추이가 기대된다.

 

 하늘이 정말 맑았다. 무슨 푸른색 도화지 보는 것 마냥. 주변을 둘러봤다. 전 건물 옥상이 다 이어져 있는 구조. 바닥의 타일 하나하나도 꽤 공들여서 만든 느낌이 물씬 풍겼다. 생각을 반복했다.

 '이 건물, 아무리 생각해도 누군가의 꿈이었을 거다.'

 그런 누군가의 꿈이 깃든 공간에서, 자리를 잡고 책을 펴 읽기 시작했다. 앉으면 밑에 설치된 스피커에서 음악이 나오는, 발상이 좋은 벤치였다. ...가만히 앉아서 생각하기는 참 좋지만, 책 읽기에는 아무래도 불편하다는 감상이 남았다. 소설 도입부 배경은 눈 오는 겨울, 그리고 아주 고요하고, 애틋한 곳이었는데 의자 밑에선 산뜻하고 발랄한 음악이 흘러나왔으니. 결국 자리를 옮겼다. '음악벤치'로부터 좀 떨어진 곳으로.

 

 수목 옆에 긴 의자가 있어 거기 앉아 읽다가, 드러누웠다. 좋은 풍광이었다. 하늘은 기분 좋게 새파랬고, 구름은 한 점도 없고, 바람은 산들산들 불고, 그래서 허공에는 내 팔과, 팔이 떠받치고 있는 책이 펼쳐져 있을 뿐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파반느>를 읽으니, 소설이란 건 참 가소롭다는 생각이 들었다. 주인공의 의식 흐름을 보면, 세상에 오직 그만이 생각이 있고 의식 있는 것 같이 느껴진다. 이른바 중2병인가?

 나도 옥상정원에서 중2병에 걸렸기 때문에, 의식 과잉이 느껴지는 대목에선 나도 '소설 같이' 생각했다. 예를 들자면 이런 거:

 ..스물 한 살이라. '스무 살은 싱그러워보이는데 스물 한 살은 한풀 꺾인 느낌이 난다' 라고. 올해 초에 친구에게 보낸 편지 중에 그렇게 적었다. 그렇게 한풀 꺾인 나이에, 나는 돈벌이를 마치고 누군가의 꿈이고 이상이었을 공간에 누워 소설가의 꿈을 읽는다. 제목은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 주우욱은 와앙녀를 위이한 파반느으으으. 이름 멋지다. 그런데 나는 디에고 벨라스케스도 처음 들어봤고, 표지 그림이 <시녀들>이란 것도 책날개를 통해 알았고, 파반느가 어떤 음악 형식인지도 모른다. 들어본 적은 있지만.

 사실 주인공은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 그냥 그저 그런 소시민일 텐데, 소설로 옮겨 놓으니 그만한 사상가가 없다. 의식 과잉이라 어떤 대목에서는 좀 불쾌하기도 하다. 너만 주인공인 양. 이 책을 읽고 있는 나도 나라는 인생의 화자인데. 너와 다른 점이 있다면, 이끌어가시는 분은 따로 있다는 거 말이지.

 이내 덮어버렸다. 그래, 그거 하나는 인상깊더라. 인간을 두고 '코끼리 똥'이라고 하는 거. 결국 소설 속의 너도, 나도, 그리고 잘났다고 날고 기는 이런저런 인간도 모두 실은 코끼리 똥이다. 옆에서 날아오는, 나무에 주는 거름 냄새보다 더 독하고 역겨운, 똥일 수 있다.

 혼자, 재밌는 발상이라고 생각하고선 '한 편의 소설처럼'이란 카테고리를 만들었다(맨날 카테고리만 늘어간다..). 이 카테고리가, 공개설정으로 써서 함께 나눌 수 있는 것이 되길 소망해본다(늘 비공개로 일기만 쓰니까 방문자도 적고, 활동도 없는 거로 간주되어 친구들에게 초대장도 줄 수 없다).

 

'등산 여정 > 이미지' 카테고리의 다른 글

#2 불완전한 왕좌  (0) 2012.06.12
잃어버린 지하도  (2) 2012.06.03
#1 하늘  (0) 2012.05.31
신천 거리, MOT <카페인>  (0) 2012.04.26
화장-1: 04.23 아침의 의문  (0) 2012.04.25
Posted by 비류
|

 연락 잘 안하는 내 습성을 고치고자, 멘티들에게 문자를 돌렸다. 야자 때문에 다들 11시가 넘어서야 답장이 왔다. 한 명 한 명 붙잡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두런두런 나누었다. 그리 길지 않은 시간이었지만 전화로 한다는 게 정말 아쉬웠다. 아웃팅 한 번 해야지.
 통화를 마치고 책상을 정리하는데 문득 '야자'에서 생각이 머물렀다. 참 많은 풍경들이 차례차례 지나갔다. 그 가운데 느끼는 건 '따뜻함'이었다. 뭐가 야자를 '따뜻하게' 기억하도록 만든 걸까? 생각은 꼬리를 물고, 새로운 생각을 뿜어냈다.
 언론이나 대중적인 인식을 보면 야간자율학습은 강제라는 인식이 강하다. (하기 싫은)공부를 억지로 심야까지 남아 해야 하는 고역이라니. 공부하기 좋아하는 학생이 드물다는 걸 감안하면 정말 끔찍한 일이다.
 하지만, 우리 학교는 분위기가 많이 달랐다. 늘 야자 신청인원이 수용인원을 넘어섰고, 따라서 자리다툼이 치열했다. 야자 담당 선생님들은 매번 고생이 많으셨다. 결석이나 도망으로 오점이 생긴 애들이 야자 빼지 말아달라고 매달리는 통사정 들어야지, 못 들어간 애들은 자리 나면 자기한테 달라고 부탁 또 부탁을 하지.. 이런 분위기 속에서 2,3학년을 보냈기에 야자에 대해 '강제'라는 이미지가 없었다.
 그리고 나는 '야간자율학습'이라는 의미에 정말 충실했다. 내가 하고 싶은 공부(대개 문학)를 자율적으로 했다. 수능대비공부가 안 되는 날이면 망설이지 않고 소설이나 시집을 꺼내 읽거나, 생각나는대로 글을 썼다. 피곤하면 엎드려 잤다(선생님들이 깨우셔서 중간에 일어나긴 했지만). 자유롭게 산책했다. 학교 건물 안을, 밖(운동장)을. 야자실 전체의 고요함은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는 데 집중하기에 최적의 환경이었다. 수능이나 모의고사, 중간기말고사가 가까워질 때 생기는 특유의 긴장감은, 어느 하나에 좀 더 치열하게 몰두할 수 있는 좋은 조건이었다.
 마지막으로, 끝나고 돌아가는 시간이 무척 좋았다. 우리 학교는 9시와 11시 반 이렇게 두 번의 귀가시간이 있었는데, 나는 대개 11시 반에 가곤 했다. 11시 반을 몇 번 치러낸 사람은 알 것이다. 30분이 가까워질 무렵부터 여기저기서 분주히 나는 바스락바스락 소리와, 곧 집에 간다는 무언의 분위기와 표정들을. 그 순간의 야자실 분위기를 무척 좋아했다. 오히려 그때, 끝났을 때보다 더 많은 카타르시스를 느꼈다. 친구들과 삼삼오오 모여 집으로 향하며 즐겁게 이야기 나누는 것도 사랑했다. 조금 과장해서 이야기하자면, '전우애'를 느꼈다고나 할까? 긴 시간, 함께 야자를 거쳐 각자 집으로 돌아간다. 내일이 되면 또 학교에 오고, 야자를 치르게 된다. 그런 동질감이, 우리들 사이에는 있었다.
 그래서 야자를 생각하면 따뜻하다. 다시 그때로 돌아가 야자를 하고 싶을 때도 있다. 수험생이라는 신분은 끔찍했지만, 야자를 할 때는 수험생활 중에 가장 행복한 순간이 아니었나 하고 회상한다.

 글을 마치는 지금은 12시 18분. 몇 년 전에도 야자를 마친 뒤 이 시간에 이 짓(일기쓰기)을 하고 있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_달라진 거라면 대학생이 되었다는 것과, 이제는 야자를 하고 싶어도 할 수 없다는 점 등등 많은 것이 변했다. 고등학교 생활 언제 끝나나 싶었는데 벌써 이렇게.
 아, 세월은 사람을 기다려주지 않는다더니.

Posted by 비류
|

#1
 그리고 작전에 나가서 비로소 인생에는 유치한 일이 없다는 것을 알았다. 서울역에서 두 연인들이 헤어지는 장면을 내가 깊은 연민을 가지고 소중히 간직하던 것과 마찬가지로, 미자는 우리들 모두를 제 것으로 간직한 것이다. 몰개월 여자들이 달마다 연출하던 이별의 연극은, 살아가는 게 얼마나 소중한가를 아는 자들의 자기표현임을 내가 눈치 챈 것은 훨씬 뒤의 일이다. 그것은 나뿐만 아니라, 몰개월을 거쳐 먼 나라의 전장에서 죽어간 모든 병사들이 알고 있었던 것이다.

-황석영, <몰개월의 새>中

#2
 "서울 두 장이요."
 "오늘은 200원 없나봐요?"
 "예. 깜빡 잊고 두고 나왔네요. 하하. 감사합니다."

 학교에 도착하는 아침이면 도서관 매점 아주머니와 늘 주고받는 대화다. 대개는 200원을 챙겨와서 "서울 두 장이요/감사합니다."로 끝나지만.
 통학버스로 오가는 데 하루에 8200원이 든다. 그래서 두 장씩 사려고 만 원을 내곤 하는데, 잔돈이 없으면 1800원을 받았다. 주머니 속에서 꽤 많은 양의 동전이 짤그락거리는 게 그리 싫진 않지만, 거슬러 받기도 번거롭고 지폐가 한 장만 돌아오는 걸 보면 뭔가 마음에 차지 않았다. 참 이상한 강박이다. 그 때문에 200원을 준비해가곤 했다. 총 10200원. 그럼 서로 계산도 쉽고, 지폐가 두 장이 돌아와서 동전보다 더 부자가 된 기분이라 좋았다.
 이런 일을 반복하다보니 어느 때부터 아주머니께서 나를 인식하기 시작했다. 눈썰미, 붙임성이 좋으셔서 여러 사람을 알고 계셨다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내게는 고유한 특징이 있었다. 늘 200원을 준비해오는 남학생. 착실하게 준비해오다보니, 어느 날은 잔돈이 필요했는데 먼저 2000원과 승차권 두 장을 꺼내놓으셔서 멋쩍게 웃은 일도 있다.

#2-1
 "서울 두 장이요. 아주머니 저 휴학해요."
 "응? 휴학? 왜."
 "뭐, 군대도 가야 하고.."
 "아 그래? 그럼 다음 학기 와서 사지 왜 미리 사둬."
 "기념으로 간직하고 있으려고요."
 "혹시 환불 받고 싶으면....(중략)"

#3
 1년. 아니. 1학기하고 2학기니까, 도합 6개월. 그동안 '200원'이라는 의도하지 않은, 소박한 방법으로 누군가에게 각인되었다. 그 과정 중에 매일 짤막한 이야기를 주고받고, 때론 일부러 잔돈을 만들기 위해 800원을 받기도 했다. 책상 위에 놓인, 움푹 파여있는 질그릇 안에 미처 처리하지 못한 잔돈들이 남아있다.
 이렇게 보면 무슨, 서로를 무척 특별하게 생각하는 사이 같다. 그러나 실상은 별 거 없다. 아주머니는 내가 뭘 전공하고 있는지, 서울 어디 살고 있는지, 모른다. 나는 아주머니가 언제부터 여기서 매점을 운영하게 되셨는지, 간식으로 무슨 음식을 추천하시는지, 모른다. 결정적으로 아주머니도 나도 서로의 이름을 모른다. 언제 쓸지 모르는 여분의 승차권을 사고 나오면서 여쭤볼까 했지만, 그럴 필요는 없었다. 그저 남남일 뿐이었다. 의미부여하며 갖다 붙인다 한들. 그래서 무미건조하게 발걸음을 옮겼다.

#Overall
 '몰개월의 새'에서 여주인공 '미자'는 파병 나가는 주인공 '나'를 배웅한다. 그런 모습을 보면서 '나'는 이전에도 이러한 광경이 있었으리라 짐작한다. 하지만 결코 나쁘게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의 고백처럼 "살아가는 게 얼마나 소중한가를 아는 자들의 자기표현"으로 받아들인다.
 혹시 아는가. 몇 년 전에도 나처럼 꼬박꼬박 잔돈을 준비해오는 학생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학교를 졸업하여 떠나고, 신입생인 내가 들어오고, 반복되고, 반복되고.. 그런 과정 속에서 어렴풋이나마 나는 기억될 것이다. 어차피 몇 년 뒤면 내가 떠나고 다른 사람이 들어오리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아주머니는 나에 대해 아무것도 묻지 않았던 걸지도 모른다. 그리고 나도, 이 간극을 메울 필요는 못 느꼈고.
 다만 '지나간 사람들'은 아주머니를 기억하리라. 그렇기 때문에 학생들에게 더 친밀하게 대하시는 걸지도 모르겠다.
Posted by 비류
|
#1
 "사람들이 그리 아둥바둥 열심히 사는 이유는 안정감을 얻기 위함이다."
 아는 누나가 이렇게 입버릇처럼 말하곤 한다. 잠깐만 생각해도 바로 수긍할 수 있는 좋은 통찰이다.

#1-1
 청소년들이 집단 세뇌되어 향하고 있는 '성공'. 여러 의미가 있는데 가장 큰 것은 '돈 많이 벌고, 높은 사람이 되는 것'이다. 왜? 먹고 살 걱정 없게. 성공하고 싶은 이유치곤 시시해서 더 물어봤다.
-그게 뭐가 좋은데? 
"인생을 즐길 수 있고, 스트레스 안 받고,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고."
 이외엔 딱히 답하지 못했다.
-행복이 좋을까 성공이 좋을까? 
 그런 질문은 처음 듣는다는 듯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1-2
 오늘 나는 초저녁에 잠이 들어 새벽에 일어났다. 밖은 오싹할 정도로 고요하고, 번잡하던 도로엔 차도 거의 보이지 않았다. 불이 켜져 있는 집은 한 동에 두 가구 정도. 다들 잠들어 있었다. 시간대가 비슷한 수 억명의 사람들이 각자의 공간에서 죽은 듯 자고 있을 거라 생각하니 기분이 묘했다. 바로 어제, 오늘을 준비하며 잠들었겠지.
 해가 뜨고 날이 서서히 밝아오면 거리에는 다시 사람이 가득 차고, 도로는 막히고, 소음은 미친 듯이 도시를 휘감을 것이다. 보이지 않는 경쟁이 사방에 널려 있고, 하나하나 뛰어넘어야 할 역경들이 도사리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왜? 심지어 가질대로 다 가져서 여생을 즐기며 살 수 있는 사람들마저 무한경쟁의 틈바구니에서 이 악물고 살아간다.

#1-3
 아둥바둥 열심히 살아도 '사고'는 불시에 온다. 가벼운 것이라면 회복될 수 있지만, 심각한 사건은 회복될 수 없다. 하루아침에 주식이 휴짓조각이 될 수도 있고, 교통사고를 당해 장애를 가질 수도 있으며, 사랑하던 사람이 갑자기 곁을 떠나버릴 수도 있다. 손에 쥐고 있는 것? 내일이면 없어질지도 모른다. 어찌 보면 우리네 삶이란 '사고'를 막기 위해 발버둥 치는 처절한 몸부림인 것 같다.

#1-4
 집 근처 길은 별 장애물 없이 뻥 뚫려 있다. 길도 잘 닦여 있어서 제대로 걷는다면 넘어질 위험도 없다.  집으로 들어가기 위해 지나가야 하기 때문에, 얼마나 걸으면 입구에 도착하는지도 감으로 알고 있다.
 어느 날은, 집에 가다가 피곤해서 눈을 감고 그 길을 걸었다. 내가 어디서부터 시작했는지를 확인하고, 한 발 한 발 또박또박 내딛었다. 그런데 앞에 뭐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아무것도 없음을 몇 초 전에 확인했는데도, 엄두가 나지 않았다. 결국 살며시 눈을 떴다.
 그리고 앞에는, 밑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아무것도 없다는 걸 생각하며 걸으면 됐다.

#1-5
 나는 예전에, 늘 불안함 속에 살았다. 집이 끼니 걱정할 정도로 가난하지도 않고, 공부를 아주 못하는 것도 아니었는데 끊임없이 걱정했다. 이것저것 사소한 것에도 스트레스를 너무 많이 받아 늘 어깨가 뭉치고 아팠다.
 하지만 지금은 이전에 비해 많이 나아졌다. 내 속에 '믿음'이 생겼기 때문이다. 세상을 창조하신 좋은 분이 나를, 그리고 모든 사람을 사랑하시고 그분의 역사하심에 따라 역사가 흐른다는. 내 인생을 가장 좋은 길로 인도하시며, 그분 안에서 완성되리라는 믿음이 있다. 안정감. 나는 내 삶 가운데 안정감을 느낀다.
 아직 믿음이 약해 내 안의 불안함이 아주 없어진 것은 아니다. 때론 믿음 때문에 남들보다 더 힘들 때도 있다. 그러나 오직 신뢰함으로 나아가려고 노력한다. 처음부터 완성된 것은 없으니까. 성장하기 위해선 시간과 양분이 필요하다. 매우 느리지만 조금씩이라도 성장한다면, 어느 순간 일정 단계를 넘고, 넘고, 넘고.. 그래서 온전한 믿음에 가까워질 것이라 확신한다.
 그리고 믿음을 그저 내 마음의 위안쯤으로 갖는 게 아니라, 모든 사람이 본능적으로 추구하는 '올바른 가치'가 세워지는 데 가장 강한 원동력으로 작용할 수 있도록 노력할 생각이다.

 내가 믿고 의지하는 이 분은, 하나님이다.
Posted by 비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