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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근하고서 할머니 댁을 찾아갔다. 집에서 출발하는 것보다 근무지에서 출발하는 게 더 가깝기도 하고, 복지관에서 돌아오신 뒤라 댁에 계신 까닭이었다. 두 달 전에 찾아갔었지만, 그새 길을 잊어버려 위성지도와 로드뷰로 검색했다.

 

 할머니가 사시는 곳은 몇 십년 전만 해도 힘차게 발전했지만, 지금은 쇠락한 동네다. 그때문인지 어렸을 적 풍경과 거의 일치했다. 달라진 게 있다면 길 양 옆으로 있던 사무실 건물들이 조금 바뀌었다거나, 리모델링을 해서 새로워진 집이 있다는 것 정도. 그리고 꼬마였던 내가 커져서, 길 폭이 좁아지고 벽이 낮아진 것처럼 느꼈다는 것.

 길을 걸으며 지난번과 같은 생각을 했다. 변한 게 없다, 생각보다 가깝다, 그런데 난 왜 이제서야 여길 찾아왔을까? 할아버지도 살아계실 때 왔으면 더 좋았을 걸. 아직 할머니라도 계셔서 다행이다. 더 자주 찾아봬야지.

 

 할머니는 저녁식사도 마다하시고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는 데 집중하셨다. 이런저런 사는 이야기, 생각들, 어렸을 적 에피소드 등. 같이 이야기하는 것만으로도 할머니께는 큰 힘이 되는 것 같았다. 이젠 연세가 있으셔서 머리도 새하얗고, 거동도 불편하시지만, 이야기할 때만큼은 예전과 다를 게 없으셨다.

 한 시간 반 정도, 내내 이야기를 나누다가 작별하고 집으로 돌아갔다. 가는 길에 많은 생각이 떠올랐다가, 가라앉았다가, 다시 튀어올랐다가, 잠잠해졌다. 이게 뭘까? 스스로에게 설명하려고 해도 뭐라 말해야 할지 모르겠는 이 느낌은. 앞으로 자주 찾아뵈면서 이 묘한 느낌을 좀 더 구체적으로 끌어내리라.

 

 가끔 할머니께 찾아가는 게, 본인은 물론 나에게도 정서적인 안정을 가져다주는 것 같다. 알게 모르게 큰 영향력을 미친다. 내 마음에.

Posted by 비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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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놀 천사

저자
아사다 지로 지음
출판사
노블마인 | 2010-10-06 출간
카테고리
소설
책소개
지금 당신에게는 추억하고 싶은 사람이 있습니까?일본문단을 대표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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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문학 책을 읽다가 지쳐 도서관(사실 '문고'라고 하는 게 더 맞을지도..)으로 향했다. 산뜻하고 읽기 쉽게 잘 쓴 저작이었지만, 예전부터 문학을 훨씬 선호했던 탓에, 목말랐다.

 

 서가를 둘러보며 무엇을 고를까 고민하는데 아사다 지로의 작품들이 늘어선 게 보였다. <프리즌 호텔>, <지하철>등등.. 그 중 <저녁놀 천사>를 골랐다. 서가에 있는 지로 작품은, 굳이 구분하자면 둘 중 하나였다. 유쾌하거나 감성을 자극하는 아릿한 것이거나. <철도원>, <지하철>, <칼에 지다>를 읽었고 그때문에 지로를 좋아하게 된 나로서는, 유쾌한 작품은 선뜻 집어들기 망설여졌다.

 단편소설집이라 호흡도 적당했고, 가슴을 적시는 좋은 이야기들도 많아 이번에도 만족스러웠다. 표제가 된 <저녁놀 천사>의 마지막 두 문단은 뭉클한 감동을 선사해주었다. 그렇게 깊게 들어가지 않아서 '내용 전게는 이게 끝?'하고 생각했는데 마음을 요동치게 하기엔 충분했다. <차표>는 '유년시절 헤어진 좋은 사람에 대한 추억'이란 소재 자체가 좋았다. 나도 그런 사람들이 있어서 공감 되었다. <특별한 하루>는 제목과 반대되게 무덤덤하고 담담한 주인공과, 반전, 그리고 끝까지 조곤조곤한 마무리가 좋았다. 나라면 어땠을까? <호박>은 이해가 부족하여 다시 읽어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언덕 위의 하얀집>은 온다 리쿠의 소설과 착각할 정도로 달콤한 동시에 오싹했다. <나무바다의 사람>은 윤동주님 작품 <자화상>을 떠오르게 했다. 시공간의 왜곡이든 환영이든, 내가 나를 만났다면? 어떤 느낌이고 그 뒤 무슨 생각을 했을까?

 

 고등학교 때 국어학원 선생님이 '어느 작가의 역량을 보려면 그 사람의 단편소설을 보라'고 말씀해주신 적이 있다. 말마따나 단편소설 여러 편을 보면 그 작가의 문체나 무게 등이 모자이크처럼 드러나곤 했다. 좋아하는 작가 중 이례적으로 단편집을 많이 읽은 지로지만, 동시에 읽을 때마다 실망시키지 않는다. 걸출한 작가다.

 그런 의미에서 다음은 지로의 장편을 선택해보기로 할까..? 글 작성을 마치고 다시 문고에 갈 생각인데, 좀 고민해봐야겠다. 

 

Posted by 비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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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자아성찰을 꽤 좋아하는 편이다(이런저런 사연이 있다.).

 성찰하기 가장 좋은 시간은 오후 10시~새벽 2시다. 그 이전엔, 아직도 분주함이 여기저기 묻어있거나 하루 마무리 수순을 밟고 있지 않는다. 대개. 그리고 2시 이후에는, 집중력도 떨어지거니와 다음날 생활에도 지장이 있기 때문에 바람직하지 않다. 가장 좋은 성찰환경은 고요한 내 방, 책상 앞이다.

 오늘, 오랜만에 성찰이 참 잘 되고 있어서 기쁘다(바로 지금 이 순간!). 하나하나 돌아보고 싶었던 부분들을 글로, 자유로운 형태와 방식으로 풀고 나니 참 개운하다. 그리고 자기 전 이 글을 적으면서, '성찰 환경'에 대해 인식하고 돌아보게 되었다.

 

 인식할 수 있는 최초의 성찰이 이루어진 건 초등학교 고학년 때. 그 환경에서, 이사가기 전인 중3 말까지 지냈다. 우리 동이 단지 끝에 있어 창문 너머가 후문 뚝방길이었고, 정말 조용했다. 차도 사람도 거의 안 지나다니고 키 큰 가로수들과 예쁜 꽃, 풀만 가득했다(지금 돌이켜보면 집 근처에 그런 좋은 장소가 있었다는 게 큰 행운이다. 꼭 방 안에서만 성찰한 게 아니라, 그 뚝방길에 반은 자연적으로, 반은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산책로를 걸으면서도 사색을 많이 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세 번 이사를 했는데, 그때가 가장 조용한 환경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언덕 도로를 올라가면 차들이 쌩쌩 달리기 때문에 소리가 안 나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요했다. 가장 우울하고 힘든 시기를 가장 좋은 사색환경에서 보냈다는 게, 참 기묘한 일치다.

 

 그 다음으론 고등학생 시절과 대학교 1학년, 그리고 스물 하나의 절반을 보낸 고층집이 있다. 집에서 지하철역은 엎어지면 닿을 거리에 있었다. 다시 말해 대로 바로 옆이라서, 소음에 쉽게 노출될 수 있는 환경이었다. 그러나 감사하게도 차 소리가 그렇게 크진 않았고, 무엇보다 내 방은 대로와 가장 멀리 떨어진, 단지 안을 넓게 조망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

 햇살이 잘 들어서 낮시간을 좋아했지만, 저녁시간도 그에 못지 않게 좋아했다. 책상 앞에 앉아 이것저것 숙제나 공부를 하다가 고개를 오른쪽으로 틀면, 불을 밝힌 각 세대의 모습이 한눈에 들어오기 때문이었다. '다들 저 속에서 뭘 하고 있을까?'라는 생각은 기본이었다. 저녁시간대 모습을 기억해두었다가 새벽시간에 다시 밖을 보면, 극명하게 차이가 드러난다. 불이 켜진 세대가 거의 없다. 그때마다 '바쁘게 사는 것'이나 '밤이 주는 휴식'과 같은, 대비적인 주제로 글을 쓰곤 했다. 모의고사나 시험을 앞둔 새벽이면 더 밤에 젖어들었던 것 같다. 이 시기 이후로 밤을 더 소중하게 생각하게 되지 않았나 싶다.

 

마지막으로 작년 하반기에 이사 온 지금의 환경이 있다.

 여기도 고층이라면 나름대로 고층이지만, 좀 애매한 높이다. 책상에서 이것저것 하다가 고개를 들면 바로 밖을 볼 수 있지만(창이 정면에 있다.), 배란다가 가로막고 있어 고등학생 때 성찰환경에 비하면 형편없다. 굳이 배란다로 나가 밖을 보면, 방이 도로 쪽이라 차들과 낮은 건물들만 보인다. 그다지 볼 게 없다. 그렇기에 한 가지 장점은 확실한 듯하다. 책상에서 하는 일에 집중할 수 있다는 것. 한 가지 생각을 쭉 이끌고 가다가, 주변 환경을 보고 다른 생각이 유입되어 흐지부지 되는 일은 없다는 것.

 물론 지금 환경이 단점만 있는 건 아니다. 생각건대 이곳은 낮에 강점이 있다. 우선 해가 적당하게 잘 든다. 기분 좋을만큼 든다. 그래서 낮시간이 상쾌하다. 또한 낮에는 멀리 산이 보인다. 아득히 먼 것도 아니다. 딱 알맞게 잘 보인다. 기분전환하고 싶을 때마다 산등성이를 천천히 훑고 있으면, 방 위치가 매우 만족스럽다.

 

 성찰환경에 대한 성찰은 처음인데, 해보니 이런저런 추억도 떠오르고 참 좋다. 현재 장소에 대해 좀 더 애정을 가지고 인식하게 된 부분도 있고. 이후에도 이 글을 여러 번 수정하면서 더 '어루만지기'해야겠다.

 언제 또 어디로 이사를 가게 될지, 어떠한 사색 장소를 발견하게 될진 모른다. 다만 한 가지 확고한 바람이 있다. 자아성찰환경이 나에게 잘 맞아서, 성숙해가는 데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것이다.

 

 길었다. 그만 자자.

 

Posted by 비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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